'저녁이 있는 삶'의 초라한 퇴장
2025-05-23 06:00:00 2025-05-23 08:55:49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가 22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정치개혁 관련 긴급 기자회견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선일까지 이제 11일 밖에 남지 않았네요. 매일 대선 관련 뉴스가 홍수처럼 밀려들지만, 이미 판세가 많이 기운 탓인지 팽팽한 긴장감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엔, 독자들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꽤나 상징적인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정치 원로인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의 손을 치켜들며 지지선언을 하는 장면입니다.
 
손 전 대표는 YS의 발탁으로 보수 계열인 민자당과 신한국당, 한나라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등 민주당 계열을 거쳤고, 말년엔 국민의당과 바른미래당, 민생당까지 섭렵한 ‘정치 풍운아’였습니다. 그 사이 복지부 장관과 경기지사, 4선 의원을 지냈고, 대선에도 여러 번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 손 전 대표의 등장에 눈길이 갔던 건, 2012년 대선에 도전하며 그가 전면에 내세웠던 슬로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있는 삶’이 바로 그 슬로건인데요. 한국 정치사에서 등장했던 대선 슬로건 가운데 가장 매력적이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당시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천편일률적이고, 진부하고, 엄숙주의에다 도덕주의로 범벅이 되곤 했던 정치 구호가 비로소 인간의 숨결을 찾은 듯하다. 직관적으로 가슴에 와 닿으면서 시적인 울림이 있는, 독특한 발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손학규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패배했지만, 각오 만큼은 비장했습니다. 당시 그는 “저녁이 있는 삶을 돌려 드리겠다. 일하고 또 일했는데 삶이 여전히 고단하고 희망을 찾기 어렵다면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정당하게 쉬어야 한다. 8시간 일하고 그 뒤에는 가족, 이웃, 연인, 친구와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당신의 따뜻한 저녁 밥상에 조용히 불을 밝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제 돌연 김문수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겁니다. 그가 손을 치켜들어준 김 후보는 노동시간 유연화를 주장하며, 중대재해법과 노란봉투법에 대해 “이런 악법이 기업을 괴롭히지 못하게 고치겠다”고 주장합니다. 과거 고공농성 노동자를 향해 “자살 특공대 같다”고 조롱했고, “불법파업에는 손배폭탄이 특효약”이라며 노동권 무시를 일삼았던 인사입니다. 김 후보에게 ‘노동자의 저녁’은 없습니다. 지난 1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손 전 대표에게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요.
 
초라하게 변해버린 노정치인의 황혼을 보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그의 가슴 설레는 구호도 어제의 선택으로 완전히 퇴색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도전도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가 대한민국 정치에 남긴 ‘유산’이라고 할 만한 ‘저녁이 있는 삶’이 대중들에게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고 싶은 유권자들의 소박한 소망은 새 대통령뿐 아니라, 후대의 정치인들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저녁이 있는 삶’을 향한 여정의 2막이 다시 오르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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