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강예슬 기자] "다른 건 괜찮은데 윤석열이가 웃으면서 투표하는 사진 올라오는 것 보니깐 화가 엄청나네요."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 고진수(52)씨가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한 지 111일이 흘렀습니다. 그사이 헌법재판소는 내란 수괴 윤석열씨를 파면했고, 6월3일 새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하지만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 지부장인 고씨의 삶은 2021년 12월 이후 별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코로나19를 이유로 정리해고된 뒤 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거리 위 투쟁이 4년째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월13일 회사에 목소리가 닿지 않자 결국 고공농성을 택했습니다. 서울 중구 세종호텔 앞 10미터 높이 지하차도 진입 차단 구조물 위는 그가 밥을 먹고, 몸을 뉘는 공간입니다. 가로 폭은 1m가 채 되지 않습니다. 자다가 몸을 뒤척이기도 어렵습니다.
<뉴스토마토>는 정권 교체와 새 정부 출범을 맞아 저마다의 이유로 망루에 오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이 차기 정부를 이끌 대통령에게 전하는 바람은 소박했습니다.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하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고진수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이 3일 오후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사진=뉴스토마토)
세종호텔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12월 경영난을 이유로 고 지부장을 포함한 직원 12명을 정리해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입니다. 노조는 회사의 조치를 부당노동행위이라고 판단, 부당 해고를 주장했지만 노동위원회와 법원은 모두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고 지부장은 "처음에는 회사의 노조 파괴를 막고, 각종 고용 형태가 비정규직으로 되는 걸 막으려 싸웠고 현재는 정리해고를 인정하지 않아 싸우고 있다"며 "법원은 코로나 때 호텔이 어려웠다는 사실만으로 정당한 해고라고 보지만 10년 이상을 싸운 우리는 그게 아니다, 부당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고 지부장이 있는 곳에서 1㎞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또 다른 고공농성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의 싸움입니다. 김 지회장은 지난 3월15일 서울 중구 한화빌딩 앞 폐쇄회로TV(CCTV) 철탑에 올랐습니다. 지난해 4월 조선업 불황으로 삭감된 상여금을 원상 복구하라는 요구를 가지고 19개 하청업체들과 임금·단체교섭을 진행했지만, 1년이 다 되도록 진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철탑에서의 생활은 쉽지만 않습니다. 원형으로 된 공간에선 제대로 눕는 것도 어렵습니다. 천막으로 겨우 햇볕을 가리기는 했지만, 여름이 다가오자 더위를 피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김 지회장은 "아직 저녁은 선선해 그나마 나은데, 오후 1시쯤이 돼서 바람이 안 불면 찜통처럼 덥다"고 했습니다. 담담하게 처지를 설명했지만 몸은 고돼 보였습니다.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이 서울 중구 한화빌딩 앞 30미터 높이 CCTV 철탑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송예은 금속노조 조합원)
그는 철탑에 오르게 된 이유에 관해 "한화오션은 우리하고 근로계약을 체결한 관계가 아니라고 하고, 하청업체는 원청이 기성금을 올려주지 않으면 자기들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며 "교섭을 해도 안 되니, 우리 주장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김 지회장의 바람은 하청노동자도 원청과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 2·3조 개정입니다.
박정혜(39)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도 투표를 포기하고 고공농성장을 지킨 이들 중 한 명입니다. 지난해 1월8일 한국옵티칼 구미공장 옥상에 오른지 513일째입니다. 그는 2022년 11월 10년 넘게 일한 회사에서 해고됐습니다. 그해 10월4일 화재로 한국옵티칼 구미공장에 화재가 나 공장이 모두 불에 타자, 회사는 한 달 만에 '청산'을 발표하고 노동자를 희망퇴직시켰습니다. 희망퇴직을 거부한 이들은 해고 대상자가 됐습니다. 현재 박 수석부지회장을 포함해 7명의 노동자가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사측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자매법인 한국니토옵티칼은 100명이 넘는 노동자를 신규채용 했면서도, 박 수석부지회장 등의 고용은 거부하고 있습니다.
박정혜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이 구미공장에 올라 해고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박 수석부지회장은 "(2019~2020년) 회사가 힘들어 구조조정할 때도 남아서 일했는데, (자매법인에서) 신규채용할 여력이 있으면서도 7명의 고용승계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니 배신감이 크다"며 "외국계 기업에겐 세금으로 각종 혜택을 다 주면서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으니까 노동자들을 내팽개치고 돈만 벌고 나가는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12·3 불법 비상계엄부터 6·3 조기대선에 이르기까지 옥상을 지키는 박 수석부지회장은 "(대선 후보자들이) 고공에 있는 저희 한 명의 표는 그다지 필요가 없는 것 같다"며 "경제를 살리겠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너도 나도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 우리는 없는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애초에 법과 제도만 잘 만들어졌다면 우리 노동자들이 이렇게 힘들게 투쟁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낮은 곳에서부터 있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부터 들어야 되지 않을까요"라고 되물었습니다.
박씨의 메신저 프로필에는 '이겨서 땅을 딛고 싶어요'라는 문구가 담긴 배지 사진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박정혜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의 메신저 프로필에는 '이겨서 땅을 딛고 싶어요'라는 문구를 담은 배지 사진이 올라가 있다. (사진=금속노조)
강예슬 기자 yea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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