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진짜 대한민국을 응원하며
2025-06-05 06:00:00 2025-06-05 06:00:00
“어쩌면 어빙씨는 진짜로 믿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는 반유대주의자이고 그걸 믿는 겁니다. 자기가 말하는 걸 정말 믿고 있다면 그가 거짓말한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1996년, 영화 <나는 부정한다> 속에서 재현된 ‘세기의 재판’에서 판사는 이렇게 묻는다.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진실을 다룬 데보라 립스타트 교수의 책에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로 언급된 데이빗 어빙이 데보라 교수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면서 벌어진 재판이었다. 질문을 던졌던 판사는 결국 이렇게 판결한다. 
 
“역사적 기록을 왜곡한 것은 의도적이었으며 어빙은 그런 사건들을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믿음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게 함에 있어 역사적 증거를 왜곡하고 조작함과 관련이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 고로 본 법정은 피고 측 주장이 정당하다고 본다.”
 
법원은 데보라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것은 홀로코스트를 인정한 것이었다. 당연한 판결이지만 과정은 그리 상식적이지 않았다.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보면 피고(또는 피의자)는 판결 전까지 무죄이므로 유죄를 주장하는 원고가 피고의 죄를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영국의 법은 원고가 잘못됐다는 걸 피고가 입증하는 방식이어서 피소당한 데보라는 홀로코스트가 엄연히 존재했던 사실이라는 걸 직접 증명해야 하는 황당한 상황에 놓인다. 
 
“제가 가진 거라곤 제 목소리와 양심뿐이에요. 전 그걸 무시할 수 없어요.” 
“양심이란 참 이상한 거예요. 문제는, 가장 옳다고 느껴지는 것이 반드시 가장 효과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똑바로 서서, 악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의 감정을 말하고 싶겠죠. 그러면 아주 만족스럽겠죠. 하지만 어떻게 될까요? 패배의 위험을 감수하게 되죠. 당신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다른 이들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영원히.”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데보라에게 변호사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이 지켜보는 재판에서 침묵해야 하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문다. 변호사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략을, 전략 속에서 나오는 그들의 말을, 그리고 이겨야 한다는 그들의 신념과 열정을. 하여 ‘세기의 재판’은 데보라 교수로부터 시작됐지만 변호사들의 힘으로 끝날 수 있었다. 
 
영화 속 재판이 거둔 승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빙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걸 뜻한다. 말을 거짓말로 증명한다는 것은 다시는 그 사회에서 그 말이 힘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대한 믿음까지 저버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함부로 믿음을 표현하거나 믿음을 앞세워 선동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마침내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한반도는 가로로도 양분돼 있지만, 세로로도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서쪽은 파란색, 동쪽은 빨간색. 절반이 지지하고 절반이 반대하는 선거 기간 동안 수많은 말들이 난무했고, 그 중에는 어빙처럼 믿는 대로 표현되는 숱한 조작과 왜곡들이 넘쳐났다. 
 
새 대통령의 어깨가 무겁다. 의도된 조작과 왜곡들이 모두 법정의 판결을 받을 수는 없다 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제 정치로 해결해야 한다. 거짓말을 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거짓말을 멈추게 해야 한다. 그것이 포용이고 화합이다. 대통령이 공언했던 대로 ‘보복 정치 않겠다’, ‘능력 있는 인사를 등용하겠다’는 약속이 잘 지켜진다면 화합의 출발선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다만, 국정은 대통령 한 사람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므로 데보라와 변호사 팀처럼 역량 있는 보좌진들의 협응이 절실하다. 앞으로의 5년이 기대된다. 진짜 대한민국,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승연 작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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