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7일 언론에 발표된 한 조사에 따르면 국민 절반 이상이 ‘장기적 울분 상태’에 있다고 한다. 서울대보건대학원 연구팀은 4월 15~21일 18세 이상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건강 증진과 위기 대비를 위한 조사’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4.9%가 ‘장기적 울분 상태’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분을 느끼게 하는 정치·사회 사안에는 ‘정부의 비리나 잘못 은폐’가 85.6%이고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가 85.2%로 1, 2위를 차지했다. 또한 ‘기본적으로 세상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질문에 69.5%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불공정하다고 느낄수록 울분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시점으로 추측하건대 이번 조사는 12.3 계엄사태 이후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 윤 전 대통령 체포와 구속취소, 헌재의 탄핵심판 선고 등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국민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사가 정치가 국민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도덕감정과 공정성 감각, 그리고 인간 본성의 일부로 이 둘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국민들은 관찰자로 정부나 정치인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 평가를 내리고 이런 평가는 감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감정을 도덕감정이라 한다. 이 조사에서 ‘장기적 울분 상태’라고 표현됐는데 이것은 도덕감정의 하나인 도덕적 분노로 해석할 수 있다.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는 도덕성의 평가는 이성적 판단이 아닌 감정적 평가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도덕감정론이라 한다.
도덕성이 감정적 평가라면 국민은 정부나 정당의 공적 행위로 유쾌한 감정이나 불쾌한 감정(고통)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국민의 도덕감정이다.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는 행위 쌍방을 지켜본 제3의 관찰자의 공감 여부를 도덕성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행위 쌍방은 상황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일 수 있다. 그리고 피해자가 갖는 감정(분노)은 사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피해자의 감정에 다수의 중립적 관찰자가 공감할 수 있는지로 그런 감정이 객관적 도덕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국민의 도덕감정에 국민의 공감이 관여하게 된다. 주권자인 국민은 계엄선포로 피해를 본 피해자이었고 계엄 이후에 정부와 정당이 국민주권의 침해를 어떻게 회복시켰는지를 지켜본 관찰자이기도 하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사과나 반성도 없이 계엄을 ‘계몽령’ 혹은 구국의 결단으로 정당화했고 이에 동조하는 여당의 태도에 관찰자로서 도저히 공감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주권자로서 주권침해로 고통을 받았고 관찰자로 반감이 더해지면서 국민은 도덕적 분노(울분)를 갖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사실은 도덕감정에는 공정성 감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피해자의 감정과 이에 대한 관찰자 공감 외에도). 이번 조사에서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70%에 이르렀다. 공정성 감각이란 바로 사회 정의와 관련된 감정으로 사회규범을 어긴 사람은 응분의 처분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윤 전 대통령은 내란혐의로 체포됐다가 51일 만에 법원과 검찰의 결정으로 구속이 취소됐다. 계엄을 수행한 군사령관과 경찰 수뇌들은 모두 구속이 됐는데 내란수괴 혐의를 받는 자가 풀려난 것에 공정성 감각에 반하는 것으로 - 1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상식과 공정을 내세운 이 정권은 계엄 전에도 정치검사들을 내세워 야당 대표에게는 가혹했고 윤 전 대통령과 가족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헌법과 법을 위반했다는 헌재의 선고가 내려진 후에도 검사와 판사들의 노골적 봐주기는 국민의 공정성 감각을 거슬렸다. 왜 고시에 합격한 똑똑한 검사와 판사의 공정성 감각이 문제될까? 흄은 『도덕의 원칙에 관한 탐구』에서 공정성 감각에는 평등의식과 상호의존 의식이 전제된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괴롭힘을 당해도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표현할 수 없는 비굴한 존재들 간에는 평등을 기대할 수 없고 그런 사회에서는 지배와 순종만이 존재한다. 또한 모든 능력을 갖추어 자신의 생존과 성공을 위해 타인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존재는 사회적 대화나 정의의 능력도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사회지도층인 판검사는 똑똑한 자신들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엘리트 의식이 있다. 또한 그들은 갑의 위치에서 타인의 운명을 결정하기에 생계를 위해 타인의 협력이 필요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상호의존 의식이 결여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인간의 양심은 (통념과는 달리) 이성에 있지 않고 감정에 있다는 도덕감정론자의 주장을 경청해 볼 필요가 있다. 흄은 『인간본성론』에서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고 노예이어야 한다’ 주장했다. 이성은 감정이 결정해 놓은 것을 사후에 합리화하는 데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정의를 집행하는 검사나 판사는 공정성 감각이 당연히 높아야 한다. 그러나 머리로 공정성을 습했다고 해서 공정성 감각이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평등의식과 상호의존 의식이 있어야 공정성 감각이 발현되는 것이다. 정의가 무너진 독재정권 하에서 공정성 감각이 결연된 판검사들은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이 걸리면 이익에 따라 기소나 판결하고 사후에 법의 이름을 빌어 정당화하는 법기술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정치인들은 도덕감정은 학습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것은 진화의 산물로 인간 유전자에 각인이 됐다는 것이다. 흄의 영향을 받은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도덕감정이 진화의 산물임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다윈 당시에는 유전학이나 영장류학, 인류학 등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해 도덕감정의 진화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유전학을 포함한 현대과학에 기반 한 현대진화론에서는 도덕감정의 진화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700만 년 전에 침팬지와의 공동조상에서 분리됐다. 침팬지는 으뜸 수컷이 지배하는 지배-복종의 서열사회이다. 그래서 침팬지는 공정성 감각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침팬지로부터 분리하여 다른 길로 진화했다. 인류조상은 40만 년 전부터 2인이 협동하여 사냥하는 사회를 이루면서 서로 의존하고 동등하게 여기는 평등사회를 이뤘다. 이런 사회에서 상호주의가 사회규범으로 정립됐다. 상호주의는 네가 도우면 나도 돕고, 네가 해를 끼치면 나도 해를 끼친다는 행동원칙이다. 상호주의에 따라 인류조상은 서로 협동하고 사냥에서 얻은 전리품을 공동분배했다. 그리고 협력하지 않고 사익만 취하는 얌체족(무임승차자라 말한다)이나 사냥한 고기를 나누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처벌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이것이 공정성 감각이다. 현대 영장류학자들은 3세 이하의 아동과 성인 침팬지를 대상으로 비교실험을 하여 인간 아동은 협동하여 얻은 전리품을 나누려고 하고, 협동하지 않는 무임승차자를 처벌하려는 마음이 있지만 침팬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 인간조상은 이런 상호주의에 의존하는 평등한 수렵채취사회를 짧게는 40만년 길게는 - 2 200만년을 유지했다. 이런 평등사회가 깨진 것은 5천 년 전 국가가 세워지고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된 이후이다. 인류조상은 적어도 진화사의 99%에 해당하는 기간을 평등한 수렵채취 사회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공정성 감각이 인간본성이 됐다. 여기서 유념할 점은 판검사같은 사회엘리트도 공정성 감각의 본성을 갖고 있지만 평등의식과 상호의존 의식 결여로 공정성 감각이 발현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참고로 유전학에서는 본성인 유전자형과 본성이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발현되는 표현형을 구분하고 있다).
정치인은 인간의 본성인 도덕감정을 교묘한 궤변이나 선동으로 누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수백, 수십만년을 거쳐 형성된 인간본성은 바뀔 수 없다. 정치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본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본성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의 공정성 감각이나 도덕감정을 거슬리지 않아야 성공할 수 있다. 이 점을 유념하여 새로 들어선 정부는 선동정치를 지양하고 공정하면서도 가시적 성과로 손상된 국민의 도덕감정을 회복시키기를 바란다.
김근배 숭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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