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창현 기자] 동네 병원과 의원 상당수가 5인 미만 사업장으로 분류되면서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기준법상 다양한 예외 규정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연차휴가 미제공, 시간 외 근무수당 미지급 등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겁니다. 정부가 의료혁신위원회를 출범하고 의료개혁을 추진 중이지만, 현장에서는 무엇보다 노동기본권 보장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6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에 따르면, 보건의료노조는 대한의사협회·대한개원의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한의사협회·대한병원협회 등에 14일까지 '의료계 종사자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협의'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협의 요청이 무산된 후 협회와 노조 간 협의를 다시 주문하는 것입니다. 노조는 △노동법 적용 제외 의료기관의 적용 방안 △의료기관 노동자의 최소 복지기준 마련 및 실행 방안 △협의기구 구성과 정기적 회의 진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지난 2022년부터 매년 의사협회 등에 교섭 요청을 해왔지만, 협회들은 사용자단체가 아니고 교섭에 응할 의무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며 “이들은 법정 의료인단체와 의료기관을 운영하면서 이들의 이익과 권리는 대변하는 사용자단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노동기본권 보장과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만들기 위해 교섭에 응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건의료노조가 지난 6월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 결과 발표’ 토론회를 열고 있다. (사진=뉴시스)
동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병·의원들은 대부분 5인 미만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기준법상 다양한 예외 조항이 적용됩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물리치료사, 임상병리사, 치과위생사 등의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에서 고용 안정과 임금·휴가를 포함한 근로기준의 핵심 내용인 해고의 제한 및 부당해고 구제신청(제23조1항, 제28조), 휴업수당(제46조), 연장·휴일·야간 가산수당(제56조), 연차휴가(제60조) 등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이유 없이 해고를 당하고, 연차휴가도 없이 결혼과 출산, 육아를 위해서 사직을 당하는 현실이라는 게 보건의료노조 측 주장입니다. 실제 노조가 올해 4월 인천시 부평지역 중소 병·의원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23.8%는 연차휴가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원장이 쉬어야 쉴 수 있다는 응답도 15.1% 나왔습니다.
또 응답자 39.3%는 고성과 반말, 욕설 등 폭언을 경험했다고 답했습니다. 물리적 폭행을 경험한 이들은 11.7%, 신체적이거나 언어적인 성폭력을 경험한 이들도 각각 7.1%, 10.2%나 됐습니다. 더구나 불가피하게 휴가를 써야 할 경우 노동자 스스로가 개인 사비로 대체인력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노조에 따르면, 면접조사에 참가한 한 응답자는 “아프거나 개인적으로 긴급한 일이 생겨서 출근하지 못할 경우에는 개인 비용을 써서 알바를 구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출산과 육아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임신 소식을 알리는 수간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거나 출산 후 복귀를 보장받지 못해 경력단절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아이를 낳고 키우기 위해서는 퇴사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일과 가정 중 하나를 포기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울 한 소아청소년과 병원에서 사람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보건의료노조는 의료현장에서 최소한의 노동권을 보장받기 위해선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이 확대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래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 근로기준법상 예외 조항을 적용하는 건 영세 사업자의 경제적 여건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소득자로 분류되는 의사, 의료기관장을 영세 사업자라고 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5인 미간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야말로 법적 보호의 필요성이 가장 크지만 열악한 현실에서 차별적인 노동조건을 견디고 있다”며 “의원급 의료기관의 의사들은 연간 수억원의 수입을 올리는 지불능력이 충분한 사용자들이다. 5인 미만이라는 법적 허점을 이용해 노동자들의 기본권마저 무시하는 건 사회적인 책임 회피”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는 건 결국 대국민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충분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면 환자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의료계 이해당사자들이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대화에 나서는 동시에, 기본적인 노동권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서 근로기준법 확대 적용이 시급하다”고 했습니다.
안창현 기자 chah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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