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넷플릿스에 공개된 시리즈 '당신이 죽였다'에는 초고위층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증권사 직원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노진호라는 증권사 부지점장은 지점의 매출을 견인할 정도로 높은 성과를 기록하는 소위 '잘나가는 PB'다. 각고의 노력 끝에 재력가를 고객으로 또 확보한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회사는 노진호가 고객 돈을 가지고 중국으로 도주한 것으로 판단, 해고로 마무리 짓는다. 회사는 고객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투자금을 보상(합의)하고 해당 고객은 투자금을 회사로부터 돌려받는다. 다음은 노진호의 가족과 회사가 주고받는 대화다.
"횡령이요? 무슨 감사를…어떻게 벌써 다 끝내죠?"
"워낙 신뢰와 신용이 중요한 업계다 보니, 아주 간혹 노진표 부지점장처럼 직원 개인의 일탈 사고가 터지면 전문 인력들이 빠르게 조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노진표 부지점장의 횡령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경찰 조사 없이 휴직과 해고로 조용히 징계 절차를 마무리하도록 결정했습니다. 통 큰 결단을 내리기까지 회사도 고민이 많았다는 점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금융업계에서는 외부로 알려지는 사고 외에는 위 드라마처럼 회사 '개인 일탈 사고'로 판단, 회사가 그 피해액을 떠안고, 사고를 황급히 마무리하는 일이 왕왕 있다고 전해진다. 회사의 단호하고도 신속한 일 처리도 낯설지만은 않다. 금융사들은 직원의 이 같은 류의 사고를 '개인의 일탈'로 간주하는 일이 많다. 회사가 장부와 외부 증빙 등을 수시로 대조·검사하고, 고객 입출금 계좌 개설 시 신원 확인, 절차 및 통제, 그리고 모니터링을 까다롭게 한들, 아무리 애써도 '범죄를 저지르고자 마음먹은 사람을 막지 못한다'고 항변한다.
반복되는 금융사고의 대안으로 제시된 책무구조도가 적용돼 내부 통제의 책임자로 지정된 임원이 사고 책임을 지는 첫 사례가 나올지 금융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은 금융감독원 앞에서 시민단체가 금융사고 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금융투자회사들의 금융사고(금전사고)는 2021년 212억원, 2022년 258억원, 2023년 377억원, 2024년 1462억원에 이르고 있다. 매년 수백억 원대 사고가 일어나고 있으나 지난해 특정 회사에서 초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하며 그 규모가 이례적으로 급증한 바 있다. 대개 회사의 규모와 조직이 클수록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고 여겨지지만,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자금의 규모를 떠나 사고가 반복되는 회사의 경우다. 부정행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곳의 경우 매번 이를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수 없으며 사고를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병폐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반복되는 금융사고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책무구조도다. 금융회사의 임원 별로 내부통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책임 영역을 규정해 일종의 지도 성격인 책무구조도로 작성하고, 이를 금융당국에 제출하는 식이다. 사고 발생 시 해당 임원이 자신의 책임 범위 내에서 내부통제 의무를 수행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금융투자업계에 관련 법령이 시행되면서 책무구조도 도입 이후 첫 사례에 대해 업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최근 들어 연이어 터지고 있는 증권사 직원의 사고에서 책무구조도가 어떻게 적용될지에 대한 관심이 많다. 범죄를 저지르기로 마음먹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꼬리 자르기'식으로 해결하던 과거와 달리, 책무를 지닌 임원이 이를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됐다. 반대로 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당 임원이 평소에 최선의 주의를 다했다면 책임을 면할 수도 있다. 책무구조도의 첫 사례에 대한 적용 결과가 책무구조도의 실효성을 입증하는 가늠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보라 증권팀장 bora1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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