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엘리트 증오’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2026-05-07 06:00:00 2026-05-07 06:00:00
우리는 흔히 극단주의와 폭력을 사회의 외곽, 혹은 소외된 계층의 전유물로 치부하곤 한다. 가난과 무지가 분노를 낳고, 그 분노가 질서를 파괴한다는 통념이 오랜 시간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전개되는 일련의 사태들은 이러한 우리의 안이한 이분법을 정면으로 비웃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보루이자 이성적 판단의 주체여야 할 ‘중상층 엘리트’들이 도리어 시스템을 파괴하는 선봉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2021년 1월6일, 미 의사당 난입 사태 당시 미국 언론이 마주한 진실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성난 노동자들의 우발적 난동일 것이라는 초기 예측과 달리, FBI 수사망에 걸려든 이들은 전직 올림픽 메달리스트, 군 장교, 기업 임원, 그리고 교사들이었다. 뉴욕타임스가 표현한 ‘우리가 몰랐던 빅텐트(Big Tent)’는 바로 증오심에 가득 찬 엘리트 연합을 지칭한다. 사회적 성취를 이룬 이들이 왜 헌법의 전당을 유린하는 폭도로 변모했는가. 이들은 더 이상 소외된 약자가 아니라, 시스템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면서도 그 시스템을 부정하는 ‘내부의 적’이 되었다. 이번 트럼프 전 대통령 암살 시도범의 프로필 역시 이 궤를 같이한다. 캘리포니아 공대(Caltech) 석사학위를 가진 컴퓨터 공학 전문가이자, 아이들을 가르치며 ‘이달의 교사’로 선정되기도 했던 인물. 그가 총구를 겨눈 대상은 단순히 한 명의 정치인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계약과 질서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교육받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엘리트 계층이 이토록 손쉽게 극단적 폭력의 심연으로 투신하는 현상은, 이제 미국 사회의 정신분열 징후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엘리트의 반란’은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2025년 1월, 서부지법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난동 사태를 목격했다. 재판정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법 시스템을 부정했던 이들의 면면은 충격적이었다. 기업체 대표, 치과의사 등 우리 사회의 이른바 상층부를 형성하는 인물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갈등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경제적 계급투쟁이었다면, 지금의 갈등은 정체성과 증오를 동력으로 삼는 내전적 양상을 띤다. 지식이 풍부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더욱 정교해지며, 그만큼 타협의 여지는 좁아진다. 이들에게 상대방의 논리는 반박의 대상이 아니라 섬멸의 대상일 뿐이다.
 
지난 2021년 1월 미국 워싱턴 의사당에 난입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하원에 침입하려하자 안에 있던 의원들이 대피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런 현상에 대해 스탠퍼드 대학의 샨토 아이옌가 교수는 단순한 정책적 차이를 넘어, 상대 진영을 도덕적으로 사악하고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으로 규정하는 ‘감정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라고 말한다. 엘리트 계층일수록 정보 습득력이 뛰어나며, 이는 도리어 확증 편향을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 지식은 세상을 넓게 보는 창이 아니라, 자신의 증오를 정당화하는 방패로 전락한다. 이들에게 정치는 더 이상 협상의 영역이 아니라, 선과 악의 전쟁터다. 최근 미 정치학계에서 논의되는 ‘세속적 종파주의(Secular Sectarianism)’ 개념 역시 정치가 종교의 자리를 대체했음을 시사한다. 트럼프가 암살 기도 직후 이 사건을 "기독교인을 적으로 삼은 범죄"라고 비약한 것은 전형적인 선동의 문법이다. 정치를 신성불가침한 종교적 투쟁으로 치환함으로써 지지자들에게 ‘성전(聖戰)’의 명분을 부여하고, 이성적인 토론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성문법이 아니라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라는 보이지 않는 가드레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 그 가드레일을 부수고 있는 망치는 다름 아닌 사회의 상층부, 엘리트들의 손에 들려 있다. 트럼프가 이번 사태의 원인을 상대 진영과 언론에 전가하며 증오의 불씨를 키우는 행위는, 무너져가는 가드레일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격이다. 리더가 분열을 치유하기보다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할 때, 그 사회의 품격은 실종된다. 지금 미국에서 멈추지 않는 광기는 거대한 재앙을 예고하는 신호일 것이다.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0/300

뉴스리듬

    이 시간 주요 뉴스

      함께 볼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