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가벼운 역사관, 무거운 침묵
2026-06-12 14:10:29 2026-06-12 14:10:29
[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는 일. 우리는 이를 ‘기념’이라 부른다. 참혹했던 전쟁을 굳이 기념사업 테두리 안에 두는 까닭은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축하해서가 아니라 아픈 역사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뼈저린 다짐이자 성찰일 터. 하지만 최근 들어 무거운 기억이 지닌 가치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듯한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국가 안보를 다루는 보훈기관부터 대중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대하는 얄팍한 인식과 섬세하지 못한 둔감함이 연이어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과거 상처를 어루만지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촌극이 도처에서 반복되는 형국이다.
 
최근 국방부 산하 전쟁기념사업회가 기획한 한국전쟁 특별 프로그램 논란은 국가 기관의 빈곤한 역사 인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포스터에 중국 참전 명분인 ‘항미원조’라는 표현이 등장해 거센 파문이 일었다. 전쟁 책임을 한국과 미국에 돌리는 중국 측 시각을 그대로 차용한 탓이다. 한국전쟁은 미소의 패권주의와 식민지 유산 등이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배경을 지니지만, 아직 가치관이 온전히 정립되지 않은 어린 학생들에게 자칫 전쟁에 대해 편향된 사고를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가 제기됐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즉각 엄정 조치를 지시하고 프로그램이 중단됐지만,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보훈기관에서 기획 단계부터 대중에게 배포되기까지 제대로 된 필터링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뼈아픈 실책이다.
 
역사적 감수성 부재는 공공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타벅스코리아는 하필 5·18 민주화운동 당일에 ‘탱크데이’라는 이름의 텀블러 할인 행사를 열고 과거 고문 치사 사건을 연상케 하는 “책상을 탁”이라는 홍보 문구까지 버젓이 사용해 대중의 거센 공분을 샀다. 무고한 시민들이 군부 독재에 맞서 피 흘리며 스러져간 아픈 날의 기억을, 그저 물건을 팔기 위한 가벼운 마케팅 소재로 전락시켰다. 자본주의 이윤 추구가 역사적 공감 능력과 최소한 윤리의식마저 철저히 마비시켜 벌어진 참사다.
 
심각한 대목은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무책임한 대처 방식에 있다. 사태 초기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스타벅스는 논란 당일 행사명을 슬그머니 수정하거나 홈페이지에 1차 사과문만 띄운 채 사태를 관망했다. 결국 불매운동 여파로 주간 결제 금액이 수십억원 급감하고 기업 가치가 무너져 내린 지 8일이나 지나서야 정용진 회장이 등 떠밀리듯 대국민 사과를 내놓았다. 
 
정부 부처의 소통 방식도 엇비슷했다. 전쟁기념관 사태에 대한 입장을 묻는 취재진 질의에 국방부 대변인은 “확인 후 답변하겠다”, “드릴 말씀이 없다” 등 영혼 없는 말만 반복하며 입을 닫아 비판을 키웠다. 언론과의 기싸움으로 본질을 흐리고 소통을 거부하는 행태라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부주의에서 비롯된 실수는 시스템을 고치고 반성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실수를 대하는 태도일지 모른다. 비극을 기억하는 일과 잘못을 받아들이는 일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역사는 단지 흘러간 어제가 아니라, 책임을 다하는 현재의 태도 위에서만 비로소 온전히 지켜지기 때문이다. 역사는 스스로 잊히는 법이 없다. 망각을 방치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에 의해 훼손될 뿐이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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