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1일 아침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포-19형'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단행했다고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그 다음날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북한 핵 문제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 NPT(핵확산방지조약)에 가입했다가 탈퇴하면서 핵무기를 개발한 죄를 물어 국제제재라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미국·중국·러시아라는 3대 강대국 간 지정학 게임의 일부가 된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기가 됐다. 북한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지원하면서 과거의 군사동맹 관계를 회복하고 파병을 감행, 전통적 뒷배인 중국에 이어 러시아의 지원까지 확보해 냈다.
지난해 러시아는 "북한이 자체 핵우산을 갖고 있다"(푸틴 대통령), "북한에 적용되는 '비핵화'라는 용어 자체가 모든 의미를 잃었다. 우리에게 이것은 종결된 문제"(라브로프 외교장관)라고 했고, 15년간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이행을 감시해온 전문가위원회 활동 연장에 거부권을 행사해 이 위원회 활동을 종료시키기까지 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하자마자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했고 마크 루비오 국무장관은 "어떤 제재도 북한이 핵 능력을 개발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했다.
이렇게 북한 핵 문제 해결이 더욱 난망한 상황이 되면서 국내에서는 자체 핵무장, 전술핵 재배치, 나토식 핵공유, 잠재적 핵보유 등 주장이 분출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 '민감국가' 명단에 이미 한국 포함
이런 상황에서 이번 주 초에 중 두 가지 중요한 소식이 나왔다. 우선, 미국의 에너지 정책과 원자력 연구·개발 및 군 핵무기 프로그램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에너지부(DOE)가 한국을 '민감국가'(Sensitive Counrty)로 분류, 규제하는 조치에 착수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면 원자력·인공지능(AI) 등 미국 첨단기술 분야와의 교류·협력이 엄격히 제한되는데, 한국이 미국 정부에 의해 북한은 물론 시리아, 이란 등 25개국과 함께 민감국가로 분류되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 소식을 처음 보도한 <한겨레>는 원자력 분야 전문가인 이춘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초빙전문위원이 "미국 에너지부는 원자력 산업부터 핵무기에 들어가는 핵물질까지 모두 관리하는 부서이고, ‘민감국가’를 분류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핵확산 우려"라며 "한국에서 핵무장론이 확산된 것이 이번 조치의 가장 핵심적인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국 내 핵무장 여론이 미국 정부를 자극해 사상 초유의 '민감국가' 분류 규제를 초래했다는 얘기다.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 의중까지 반영된 조치인지,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고 미국 정부의 시스템 매뉴얼이 작동한 것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비공식 제보를 받은 것을 갖고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라며 "미국도 배경과 경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고 아마 내부적으로 상황이 파악된 다음에 저희에게 의논할 것으로 안다"고 했다. 국내 핵무장 여론이 이런 동향의 원인일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여러 추정하는 논리 중에 하나로 그런 말이 도는 것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며 부인하지 않았다.
마치 비공식적으로라도 사전에 뭔가 알고 있었다는 듯 말하고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17개 국립연구소 가운데 하나인 ‘제퍼슨랩’(토머스 재퍼슨 국립 가속기 연구소)의 '민감국가'명단에 이미 한국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주한 미 대사대리, 한국 핵무장 일축…'원자력협정 개정' 거론
두 번째는 조셉 윤 주한미국대사대리가 국내 연구소 초청포럼에서 한 발언이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의 독자 핵무장에 유연한 입장인가' 라는 질문에 "미국은 아직 이 사안을 검토한 적이 없다"면서 "다만 워싱턴 내에서 북한이 핵 포기를 100% 거절할 경우에는 한국도 준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대다수는 아니지만 커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는 한국의 독자핵무장론에 대해선 "NPT체제 안에 머무는 것이 현재로서 적절하다"고 했고, 전술핵 재배치·나토식 핵공유에 대해서도 "가장 어려운 선택지"라고 했다. 이어 "워싱턴 인사들에겐 또 다른 단계가 있는데 NPT 범위 안에서 핵연료 주기와 관련된 활동을 진행하는 것"이라며 "이는 일본과 비슷한 형태가 될 수 있는데 (한국이) 일정 수준의 우라늄 농축이나 사용후 연료 재처리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셉 윤 주한 미 대사대리.(사진=연합뉴스)
한국계인 윤 대사대리는 미 국무부에서 한국·일본 담당 부차관보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지낸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 여야 인사들과 두루 관계가 깊어 한국 사정에 정통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새로 출범한 트럼프정부가 한반도에 대한 정책 검토를 마치지 않았다는 점을 전제로, 한국 내 핵무장 주장은 일축하는 한편 "워싱턴 인사들에겐 또 다른 단계가 있다"며 한·미 원자력협정의 일본 수준 개정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은 2015년에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으로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는 불가능하고 우라늄 농축도 20% 미만 저농축만 가능하다. 핵무기 전용 가능성 우려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1988년 개정 미·일 원자력협정에 따라 핵연료 재처리를 통한 상업용 플루토늄 추출과 20% 미만 우라늄농축은 가능하고 20% 이상 우라늄농축만 미국의 사전동의를 받게 돼 있어 한국과 차이가 크다. 이 때문에 현재 여야가 극단적으로 갈려 있는 가운데서도 일본 수준으로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모아져 있다.
최근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민주당과 가까운 일부 전문가들도 핵잠재력 보유론에 동조하고 나섰는데, 이는 정책적으로는 핵의 평화적 이용 확대를 위해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일본은 1977년부터 협상을 시작해서 11년 뒤인 1988년에 미·일 원자력협정을 전면 개정했다. 조셉 윤 대사대리가 전한 워싱턴 분위기 등을 감안할 때 한국도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볼 만하지 않은가?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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