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경제는 최근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래의 성장 잠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혁신이 필수적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혁신은 주로 기업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벤처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기존 제품이나 공정과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파괴적 혁신은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에서 자주 탄생한다.
미국에서는 Apple, Google 등 벤처에서 시작하여 혁신 기술, 상품으로 초대기업이 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중소기업이 기술혁신이나 신제품 개발을 통해 대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세계적인 수준의 R&D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 원인의 하나로 중소·벤처기업이 어렵게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그 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된다. 특히 일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유용하거나 탈취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중소기업의 기술 혁신 의지가 위축되고 있다.
기술을 탈취당한 중소기업이 법적 대응에 나서더라도 승소율이 매우 낮아, 소송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낮은 승소율의 주요 원인은 ‘증거의 편재(偏在)’ 문제로서 대기업이 불리한 증거를 은폐해도 중소기업은 이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의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미국의 민사소송 전반에 걸쳐 시행되고 있는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송 당사자들이 상대방이 가진 자료 가운데 사실관계 확인에 필요한 증거를 제출하도록 법원을 통해 강제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에 따라 ‘민사소송 절차에서의 압수수색’ 역할을 한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은 사법체계와 소송 절차가 달라 미국식 디스커버리를 민사소송 전체에 전면 도입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사실 한국에서도 2014∼2016년 특허법 개정을 통해 디스커버리 제도의 일부 요소를 도입했지만, 자료 제출의 불성실성이나 자료 훼손에 대한 제재 미흡 등으로 인해 유명무실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한 2020년 법무부가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입법 예고하며 ‘소송 전 증거조사 제도’를 추진했지만, 이마저도 입법이 지연되고 있다.
결국 한국에서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의 전면 도입은 어렵지만, 중소기업의 기술탈취 문제에 집중하여 특허법, 부정경쟁방지법, 하도급법 등 관련 법률에 우선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특히 모색적 증거 신청(fishing expedition)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증거 제출 면제의 범위를 명확히 설정해야 하며, 자료 제출 의무 위반 시 엄격한 제재 규정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은 중소기업 기술 보호뿐 아니라 대기업 간 기술 소송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2019년 LG화학(현 LG에너지솔루션)은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배터리 기술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때 한국 법원이 아닌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소송을 제기한 주요 이유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활용하기 위함이었고, 그 판단은 적중하여 LG는 약 2조 원 규모의 합의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한국 기업들이 미국 법정까지 가지 않고도 자국 내에서 기술 침해로부터 충분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이는 특히 미국 법정에서 소송을 진행할 수 없는 중소기업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대학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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