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잔인한 달 4월의 끔찍했던 기억
2025-04-03 06:00:00 2025-04-03 06:00:00
1960년에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다음부터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엘리어트의 <황무지>에 나오는 시구가 한국에도 널리 퍼졌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다가 총탄에 희생된 학생들을 기리는 문장에는 의례 등장하는 단골 메뉴였다. 4·19는 독재정권의 퇴진에 그치지 않고 가치관과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무엇보다도 시민이 해방 이후 교과서에만 있던 민주주의가 현실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체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민주”의 가치가 한국 정치의 기준이 되었으며 '독재'라는 낙인이 찍힌 정권은 존속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사회를 덮고 있었던 주눅과 공포가 사라지고 감성이 해방되면서 문화적으로도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대의 정서를 대변했던 신동엽 시인은 “가라,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쳤다. 
 
4월은 해방 공간에서도 잔인한 달이었다. 수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1948년의 제주 4·3 사건의 상흔은 아직도 남아 있다. 1972년에 현직 대통령이 주도한 친위 쿠데타인 10월 유신은 4월을 더욱 잔인한 달로 만들었다. 박정희는 1974년 4월3일에 유신을 반대하면 군사재판으로 사형에 처한다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하고 영장도 제시하지 않고 수천명을 체포했다.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이었다. 이는 1월8일에 발표한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면 군사재판을 거쳐 징역 15년에 처한다는 긴급조치 1호의 확대판이었다. 박정권의 폭거에 항의하는 국내외 인권운동의 압력으로 학생, 교수, 종교인들은 1975년 2월15일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러나 인민혁명당으로 조작된 8명은 1975년 4월9일 새벽에 실제로 사형당했다. 이것이 바로 '사법 살인'이었다. 이틀 뒤인 4월11일, 경기도 수원에 있던 서울대 농대에서는 유신 정권의 폭거에 항의하는 대학생 김상진이 할복 자살했다. 유신 반대 투쟁이 잇다르자 입지가 좁아진 박정희는 4월8일에 고려대를 상대로 긴급조치 7호를 내려 데모하면 3년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4월30일에 남베트남 정부가 항복하면서 국내 정세도 일변했다. 적화 위기를 내세운 박정권은 5월13일에 유신에 반대하면 영장 없이 체포해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해 사실상 모든 비판을 금지했다. 긴급조치 9호는 박정희가 1979년 10월26일에 딸 같은 여대생을 끼고 놀던 궁정동 술자리에서 피살될 때까지 수많은 구속자를 만들어내며 정권을 보위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었다. 
 
1974~1975년에 양산된 긴급조치는 유신 헌법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유신 헌법과 유신 체제는 대통령의 내란이 성공했기 때문에 작동할 수 있었다. 사실 계엄령이 선포된 1972년 10월17일은 아무런 소요 사태나 적의 공격이 없었다.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군사정권의 광폭한 통치는 10·26으로도 종식되지 않았고,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벌어진 참극으로 이어졌다. 1987년 6월에 일어난 전국적인 시민항쟁의 기세에 눌린 전두환 정권이 6·29 선언을 발표하고 물러가 간신히 절차적 민주 정치가 복원되기 시작할 때까지 시민,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이 치른 막대한 희생은 열거할 수도 없다. 작년 12월3일 심야에 평범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국회 앞으로 모여 게엄군을 저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공한 대통령의 쿠데타'가 남긴 끔찍한 기억이 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희생을 무릅쓰고 시민이 쟁취한 소중한 성과물이다.
 
이종구 성공회대 사회학 명예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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