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젠더 정의는 건강 생존권의 문제"
의학저널 랜싯 위원회, 성(sex)과 젠더(gender) 명확한 구분 강조
2025-04-28 10:03:35 2025-04-28 14:04:14
젠더 정의 실현을 위한 5대 핵심 전략. (사진=랜싯 젠더와 글로벌건강위원회)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젠더 정의 실현 없이는 건강 형평성도 없다."
 
세계적 의학 저널 랜싯(The Lancet)이 최근 공개한 '글로벌 건강에서의 젠더 정의'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달에 발간한 이 보고서는 여성이나 성소수자들이 겪는 건강 불평등 문제를 지적하며, 기존의 의료 시스템과 정책 결정 과정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젠더 불평등 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젠더 정의(gender justice)'라는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성(sex)'과 '젠더(gender)'의 차이를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학술적 구분이 아니라, 생명과 건강의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필요한 기본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성(sex)과 젠더(gender), 무엇이 다른가?
 
랜싯 젠더와 글로벌건강위원회(the Lancet Commission on Gender and Global Health)는 보고서에서 성과 젠더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성(sex)'은 인간이 지닌 염색체 구성, 생식기관, 호르몬, 생리적 특성 등 생물학적 요소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출생 시 구분되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를 바탕으로 하며, 의학적으로는 특정 질병의 발병률, 증상 표현, 약물 반응 등에서 중요한 분석 변수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심혈관 질환에서 여성은 남성과 다른 증상을 보이며, 같은 약이라도 성별에 따라 약물 대사 속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의료계는 오랫동안 이러한 생물학적 차이를 기준으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해왔습니다.
 
반면 '젠더(gender)'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입니다. 사회가 남성, 여성, 또는 성소수자에게 기대하는 역할과 행동, 그리고 이를 둘러싼 권력 구조와 자원 분배의 불균형이 모두 젠더에 포함됩니다. "젠더는 단지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라, 보건 의료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건강 서비스 접근 기회와 의료 결과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랜싯 위원회의 진단입니다.
 
젠더 정의는 곧 생존권
 
랜싯 젠더와 글로벌건강위원회는 "현재 세계 곳곳에서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의료 시스템에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여성은 출산, 월경, 폐경 등 여성 특유의 생애주기를 고려한 서비스에서 종종 배제되며, 성소수자는 의료진으로부터 편견 어린 시선을 받거나 아예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성소수자 인권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보고서는 "젠더 정체성을 이유로 생명과 건강을 위협받는 상황은, 전 인류의 건강 형평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랜싯 위원회는 기존의 젠더 이분법적 사고, 즉 '남성'과 '여성'으로만 구성된 의료 시스템이 성소수자 정체성을 의료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트랜스젠더 청소년이 겪는 정신건강 위기, 젠더 비순응자가 의료기관 방문 자체를 꺼리는 현실 등은 모두 그 결과라는 것입니다.
 
데이터에서도 사라지는 존재들
 
현재 많은 국가에서 보건 통계는 남성과 여성 이분법만을 기준으로 수집됩니다. 이 과정에서 성소수자와 젠더 비순응자들은 통계에서조차 사라진 존재가 됩니다. 그 결과, 이들을 위한 정책이나 연구가 출발조차 하지 못합니다. 보고서는 이를 '데이터 상의 침묵(silencing in data)'으로 표현하면서, 젠더 정의 실현을 위해선 보건의료 데이터 자체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다양한 젠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를 실질적으로 반영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이들이 안전하게 의견을 낼 수 있는 환경부터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건강 형평성, 젠더 인식 없이는 불가능
 
젠더 정의는 단지 여성이나 소수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건강은 젠더 구조 안에서 작동합니다. 남성 역시 '독성 남성성(toxic masculinity)'으로 인해 정신건강 문제를 외면받거나, 위험한 행동을 장려 받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젠더 정의란 특정 집단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생물학적 특성과 사회적 조건에 맞춰 건강할 권리를 되찾는 일입니다. 랜싯 위원회는 젠더 정의를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책 변화와 시스템 개혁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보고서는 총 다섯 가지 핵심 분야로 구성된 구체적 실행 전략을 제안합니다.
 
1. 젠더 정의에 대한 공유된 이해와 프레임워크 구축: 용어의 명확성 확보, 공유된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협력 등
2. 증거 기반을 강화: 행동을 위한 데이터 수집, 정리 및 확산, 모든 보건 연구에서 젠더 정의 촉진 및 인센티브 제공 등
3. 젠더 감수성 있는 보건 정책 및 부문 발전: 보건 정책에 젠더 관점 적용, 모든 보건 인력 구성원에게 공평한 기회 보장 등
4. 책임 있는 거버넌스 시스템: 젠더 정의와 보건 모니터링을 통합한 플랫폼을 구축, 국제적으로 보건 책임 메커니즘에 젠더 요소를 통합, 반(反) 젠더 세력에 맞서기, 시장을 활용한 젠더 정의 촉진 등
5. 글로벌 보건을 위한 젠더 정의에 대한 자원 및 투자: 젠더 정의를 위한 혁신적인 수익원을 개발, 국가 수준에서 젠더 투자 필요성 논리 수립 등
 
정확한 용어 사용은 곧 생존의 문제
 
전문가들은 "정책과 연구에서 성별 간 건강 격차를 다룰 때, 그 원인이 생물학적 성(sex)인지, 사회적 젠더(gender) 구조에 기인한 것인지 구분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젠더를 단순히 여성의 문제로 환원하거나, 생물학적 성과 혼용하는 관행은 건강 불평등의 구조를 가리게 만들고, 오히려 편견과 차별을 고착시킬 수 있습니다.
 
랜싯 위원회는 "세계는 지금 SDG(지속가능개발목표) 중 성평등과 건강 목표 모두에서 후퇴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젠더 정의 없이는 진정한 보건 평등도 이룰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젠더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는 이 시대에 랜싯 보고서는 '건강'을 통해 젠더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이제는 개념 논쟁을 넘어, 보편적 정의와 실질적 평등을 위한 행동의 시간"이라고 밝힌 위원회의 메시지를 세계 의학계가 어떻게 수용할지 주목됩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kosns.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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