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사법부의 ‘대선개입’ 의혹에 다시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2017년 사법농단 사건 이후 7년 만입니다. 두 사건은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에서 발생했고, 엘리트 법관들이 국민 인식과 동떨어진 관점에서 일을 저질렀다는 점에선 유사합니다. 다만 대선개입 의혹은 대법원이 실제로 판결을 선고했다는 점에선 사법농단과는 결이 다릅니다. 사법개혁을 위해선 대법관 증원과 법관 구성의 다양화 등 상고제도 개혁안 등의 방안이 쏟아집니다. 이미 오랜 기간 논의됐던 방안이라는 점에선 입법부가 개혁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주문도 나옵니다. 사법농단 때처럼 국회에서 개혁안이 가로막히는 일이 없도록 국민들이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겁니다. (편집자)
대법원과 서울고법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급발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속도전이었습니다. 최근 한 달 사이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을 두고 벌어진 법원 풍경입니다. 법조계에선 사법농단 사건 핵심 원인이던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가 이번에도 다시 판사동일체를 재현시켰다는 비판이 큽니다.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사법행정 권한을 분산하고, 특히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실질화해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을 견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조 대법원장은 대선 개입 의혹으로 수사 대상이 됐습니다. 정치권은 물론 변호사들까지 집단적으로 조 대법원장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고발했습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9일 조 대법원장을 피고발인으로 한 사건들을 수사4부(부장검사 차정현)에 배당했습니다.
민주당이 이재명 대선 후보의 파기환송 판결 관련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자진 사퇴를 공식 요구한 가운데 조 대법원장이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법조계에선 조 대법원장이 적법 절차를 어겼는지보다 직권을 남용했는지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습니다. 법제처장 출신인 김형연 변호사는 “조 대법원장은 대선 국면에서 사법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고속 재판을 했다”며 “외형상 직무집행이라는 재판 형식을 띠지만, 그 목적이 선거 개입”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소송법적 관점에서 조 대법원장이 적법 절차를 지켰는지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라며 “공직선거법 85조1항에 따르면 공무원이 직권 또는 권한을 남용해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미쳐선 안 된다. 적법 절차를 지켰다고 해도 목적이 부정한 만큼 위법하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지난 3월26일 서울고법이 이 후보에게 무죄를 선고한 때로부터 불과 36일 만, 대법원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기로 결정한 걸로 따지면 9일 만에 '이재명 파기환송' 결론이 나온 건 조 대법원장의 진두지휘 아래 초고속 심리와 재판이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란 분석이 우세합니다. 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법관들은 원칙을 기준으로 예외를 검토하는데, 이 사건 처리 과정은 검찰처럼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한 것처럼 보인다”며 “조 대법원장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법관들 머릿속에서 나오기 힘든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조 대법원장이 직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배경엔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가 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조 대법원장은 특히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농단 사건 이후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시도했던 사법개혁마저 원상복원했습니다. 사법농단 핵심 조직이던 법원행정처 상근법관을 증원하고, 대법원장의 사법행정 권한을 견제·감시하던 사법행정자문회의를 폐지했습니다. 법원장 추천제를 중단하고, 법관인사 이원화를 무시한 채 고법 부장판사들을 지법원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자신을 대법관으로 임명했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로 돌아간 셈입니다.
유승익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은 “조희대 대법원 체제에선 조금의 사법개혁 시도마저 후퇴했다”며 “대법원장이 주도권을 갖기 시작하면 대법관들은 일극체제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오선희 변호사(법무법인 혜명)도 “조 대법원장이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피라미드처럼 짜인 과거 법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 명확하다”고 짚었습니다.
특히 대법원장이 대법관의 인사권을 쥔 상태에서 전원합의체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비판했습니다. 헌법 104조는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임명 제청하면, 대통령이 국회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판사 출신인 다른 변호사는 “대법관들에게 대법원장이라는 존재는 마치 자신을 업어키운 아버지와 같다”며 “임명권자가 다양한 헌법재판소와는 논의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사법농단 이후 대법원장이 직접 하급심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우니 대법관들을 직접 움직였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조 대법원장은 2000년 사법연수원 교수를 역임한 바 있습니다. 당시 조 대법원장에게 가르침을 받은 연수원 31기들은 현재 각급 법원에서 부장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부장판사 출신인 성창익 변호사(법무법인 지평)도 “전원합의체가 권위를 가지려면 대법관들의 치열한 토론과 숙고를 통해 결론이 도출돼야 한다”며 “대법관들은 자신을 제청한 대법원장이 적극 의견을 개진할 경우 현실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후보의 파기환송심을 담당했던 서울고법 형사합의7부(재판장 이재권 부장판사)마저 대법원의 초고속 진행 속도를 따라가 사법농단의 재현이란 우려까지 나왔습니다. 유승익 소장은 “대법원이 사건을 무리하게 처리한 뒤 서울고법도 그에 발을 맞춰서 기일을 지정했다”며 “하급심이 대법원과 한 몸처럼 동조한 건 사법농단과 비슷하다”고 짚었습니다.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셉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이재명 후보에 대한 유죄 취지 파기환송) 사건으로 법원의 구조적 모순이 그대로 드러났다”며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은 개헌 사안이니, 그에 앞서 대법관추천위원회부터 다양화하며 제청 절차를 실질하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대법원장이 다른 법원을 지배할 수 없도록 사법행정권을 축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