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던 싸얌 왕국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싸얌 왕국과 국왕 라마 6세는 중립을 지켰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기울자 1917년 7월22일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싸얌이 개전에 나선 것은 승전국의 일원이 되어 유럽 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려는 의지였다.
싸얌이 프랑스에 의료부대를 파견하겠다고 제안하자 프랑스는 한술 더 떠 조종사와 수송부대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국왕과 정부는 항공부대 414명, 수송부대와 의료부대에 870명의 자원병을 모집했다. 싸얌 원정군은 1918년 7월30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고, 조종사들은 비행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수송부대는 프랑스군 병력을 최전선 상파뉴로 수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참전한 병사들이 잡역부 대접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전후 싸얌군은 바이에른 왕국의 팔츠 지역에 주둔했고, 이듬해인 1919년까지 지역을 관할했다. 파리에서 열린 전승기념행사에서도 태국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거리 행진에 참가했다. 미국은 싸얌이 요구한 불평등 조약 개정 요구를 1920년에, 유럽 열강은 1925년에야 받아들였다. 당시 아시아에서 이런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은 국가는 일본 제국과 싸얌 왕국, 두 나라뿐이었다.
중위들의 쿠데타
젊은 싸얌군 장교들은 1908년 오스만 튀르크에서 청년튀르크당이 술탄을 몰아내는 혁명을 성공시키고,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으로 청 황제가 퇴위하고 공화정이 수립된 데서 정치적 자극을 받았다.
라마 6세 왓치라웃은 9년간 유럽에 살며 영국 왕립육군사관학교와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유학파였지만, 입헌군주제와 의회 제도 도입에 부정적이었다.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은 젊은 장교들은 영국과 독일 왕실의 겉모습만 따르는 국왕에 실망하면서 1910년경부터 절대왕정에 대한 반감을 품고 혁명적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이들은 1912년 4월, 싸얌력으로 새해가 되는 첫날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는 에메랄드 사원에서 핵심 관료들을 체포하려는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음모는 누설되었고 92명이 체포되었다. 젊은 장교들의 계급은 대부분 중위였으며 이들은 1909년 사관학교에 입학한 동기생들이었다.
청년 장교들의 정치적 지향은 헌법 제정, 국왕의 권력 제한, 국민 대표를 뽑아 대의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역모에 대한 최종 처분은 왕의 관용으로 주모자는 종신형, 20명은 징역형, 나머지는 집행유예로 끝났다.
왕국이 민주국가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싸얌 혁명군. (이미지=구글 제미나이)
1932년 싸얌 혁명
라마 6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막내 동생 쁘라차티뽁이 1925년 32세의 나이로 라마 7세로 즉위했다. 라마 6세와 라마 7세에게 후사가 없었던 것은 근친혼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왕위에 오른 것은 행운이었지만, 형에 의해 재정이 파탄 난 상태였던 것은 불행이었다. 그는 최고평의회와 추밀원에 국정을 맡겼다.
왕실 예산도 삭감하고 공무원도 감원했다. 국왕은 헌법 제정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기득권층이었던 추밀원은 이를 거부했다. 국민 대다수가 문맹자라는 이유로 의회 구성에도 부정적이었다.
1924년 무렵 해외 유학생은 400명 정도였다. 영국 301명, 미국 47명, 프랑스 24명. 처음에는 왕족이 유학을 떠났지만 점차 귀족과 부유층으로 확대되었고 가난한 집안 출신 고학생들도 등장했다. 영국 유학생들은 관직에 등용될 권문세가 출신으로 출세를 위해 학업에 전념했다. 반면 프랑스 유학생들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아 이념적이고 급진적 성향을 보였다.
1912년 젊은 중위들에 의한 쿠데타 시도 이후 15년이 지난 1927년,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 유학생과 군 출신 외교관 7명이 모였다. 이 모임에 태국 역사를 크게 바꿀 두 인물이 있었다. 쁘리디 파놈용과 쁠렉 피분쏭크람이다.
쁘리디는 농민 가정 출신으로 어린 나이인 19세에 변호사가 되었고, 왕실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로 유학 와 법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피분은 과수원을 운영하던 화교 가정 출신으로 포병 대위였다. 두 사람은 이후 모두 총리를 역임했고 피분은 두 번의 쿠데타를 통해 장기집권 했다.
7명의 혁명적 청년은 1912년 실패의 원인을 민주화를 추진할 만한 대중적 기반의 부족으로 분석했다. 이들은 뜻을 모아 군사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카나 랏사돈(인민당)'을 결성했다. 현재 태국 제1당이 '인민당'이라는 명칭을 공유하는 것은 당시 카나 랏사돈이 내건 정치적 과업인 '반왕정'과 이념적 지도자 쁘리디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계승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싸얌 혁명의 이념적 지도자 쁘리디 파놈용. (이미지=구글 제미나이)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싸얌 왕국까지 밀려왔다. 1932년 정부 지출은 3분의 1로 줄었다. 정부는 세수 확보를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무원을 대량 해고했다. 생활고로 고통받으며 왕정에 대한 국민 불만이 커졌고, 91명의 장교 진급이 보류되는 등 국방 예산이 삭감되면서 군부의 불만도 고조됐다. 정규 육사 출신인 대령들이 별을 달 수 없다는 불만에서 5·16 쿠테타가 일어났고, 이에 국방장관을 맡았던 왕자가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파놈용은 관료와 교수들을 조직했고 피분은 군부 내 혁명을 지지하는 장교들을 규합했다. 해고 위기에 처한 공무원과 진급이 막힌 장교들이 인민당에 합류했다. 독일 유학을 다녀온 방콕 포병대 지휘관과 육사 교육부장도 참여했다. 당원들은 헌법 제정, 의회 구성, 국왕 권한 제한을 목표로 입헌군주제 수립에 공감했다. 1932년 인민당 당원은 102명으로 늘어났다.
정세가 무르익자 당은 거사일을 1932년 6월23일 밤으로 정했다. 비밀이 새 나갔지만 수도 방콕을 책임진 총사령관인 왕자가 체포를 하루 미루면서 결과적으로 거사는 성공했다. 국왕은 후아힌 별궁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쿠데타 소식을 들었고, 그때도 왕비와 함께 골프를 치고 있었다.
6월24일 새벽, 인민당은 쿠데타를 공식 선포하고 탱크 부대를 앞세워 궁궐을 포위하고 핵심 관료들을 체포했다. 6월26일 국왕은 쿠데타에 성공한 인민당 대표들을 알현했고, 쁘리디는 국왕에게 성명 내용을 설명하며 사죄를 구했다. 국왕은 주동자들을 모두 용서하고 해당 헌법을 수용했다. 자신이 헌법 제정을 추진한 적이 있어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무혈혁명의 성공이었다.
싸얌 혁명 이후 왕당파의 반격이 있었지만 진압되었다. 국왕은 내란 중 중립을 지키며 말레이반도로 피신했고, 이후 병을 핑계로 영국으로 망명했다. 1935년 3월2일 라마 7세는 퇴위를 선언했다.
9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라마 8세는 1946년 학업 중 의문사했다. 이후 1946년 라마 9세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태국에는 사실상 왕이 부재했다. 오늘날 태국 왕실이 위상을 되찾은 것은 전적으로 라마 9세의 왕실 경영 능력 덕분이었다.
무쏠리니를 존경한 파시스트로 장기 집권한 쁠렉 피분쏭크람. (이미지=구글 제미나이)
이지우 기자 jw@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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