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표진수 기자] 자동차 디자인의 오랜 문법 중 하나는 ‘선’이었습니다. 앞쪽 엔진룸 덮개에서부터 바퀴를 감싸는 옆면 패널까지, 차체 표면을 가로지르며 그어지는 이른바 캐릭터 라인이 대표적입니다. 이 선은 차체에 날카로운 긴장감을 불어넣고,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그림자를 만들어내면서 입체감을 살리는 조형의 핵심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벤츠는 이 문법을 거스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표면에 선을 더하는 대신 지우고, 각을 세우는 대신 깎아내는 방식으로 브랜드의 얼굴을 새로 그린 것입니다. 그렇게 완성된 디자인 철학이 바로 ‘감각적 순수미(Sensual Purity)’입니다.
더 뉴 메르세데스-마이바흐 S-클래스. (사진=벤츠)
선을 지운 자리를 채운 것은 벤츠의 상징인 삼각별, 즉 세 개의 꼭짓점을 가진 별 모양 엠블럼입니다. 벤츠는 이 삼각별 그래픽을 앞쪽 전조등과 뒤쪽 미등 안쪽에 직접 삽입하는 이른바 ‘스타 시그니처’를 전 라인업으로 확대 적용하고 있습니다. 차체 표면의 장식을 걷어낸 대신, 불이 켜지는 순간에만 드러나는 별빛으로 브랜드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방식입니다. 조형이 아닌 조명이 얼굴을 대신하게 된 셈입니다.
이 철학은 2세대 CLS와 AMG GT 등에서 구체적인 양산차로 구현됐습니다. 두 모델은 별도의 장식적인 선이나 각 없이, 오로지 곡선과 면의 흐름만으로 존재감을 만들어내며 벤츠를 가장 현대적인 럭셔리 브랜드로 재정의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위엄과 권위, 바그너서 바우디로
이 철학의 뿌리는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39세의 나이로 벤츠 디자인 총괄에 오른 고든 바그너는 업계 최연소 수석 디자이너라는 타이틀과 함께 조직을 이끌게 됐습니다. 그가 물려받은 벤츠 디자인은 보수적이고 엔지니어 중심적인 색채가 짙었습니다.
바그너는 캐릭터라인을 과감히 걷어내는 방식으로 새롭게 재정의했습니다. 차체 표면에 굴곡진 선을 넣는 대신, 둥글고 볼륨감 있는 곡면을 살리고 표면 마감을 매끄럽게 이어 붙여 장식적인 요소를 최소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디자인 전환은 그가 남긴 발언으로도 상징됩니다. 바그너는 “주름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로 선과 각을 앞세우던 기존 자동차 디자인의 문법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벤츠에 따르면 바그너는 2016년 최고디자인책임자, 즉 회사의 디자인 전반을 총괄하는 임원(CDO)으로 선임돼 이사회 멤버에도 올랐으며, 이후로도 약 20년간 브랜드의 얼굴을 그려왔습니다.
더 뉴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실내 인테리어. (사진=벤츠)
2026년 2월 새로운 국면이 열렸습니다. 메르세데스의 고성능 라인업인 AMG의 디자인을 이끌어온 바스티안 바우디가 벤츠 그룹 디자인 총괄로 부임한 것입니다. 벤츠는 회사의 전략 실행을 가속화하기 위해 고위 경영진을 대거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했고, 바그너는 본인의 요청과 상호 합의에 따라 물러났습니다. 바우디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순한 계승이 아닙니다. 감각적 순수미라는 유산 위에서 벤츠 특유의 위엄과 권위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외관은 절제, 실내는 과감하게
S클래스를 비롯한 최신 모델에는 별 모양을 형상화해 낮에도 켜져 차량의 존재를 알리는 조명인 주간주행등(DRL)이 적용돼 조명 자체가 브랜드 정체성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헤드램프와 테일램프에 통일된 별빛 그래픽을 적용하면서, 앞뒤 어느 각도에서 봐도 벤츠임을 알아볼 수 있는 새로운 인식 체계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실내에서는 여러 화면을 하나로 통합한 대형 디스플레이와, 운전석부터 조수석까지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초대형 화면인 ‘하이퍼스크린’ 등 디지털 하이테크 인터페이스가 적극 도입되고 있습니다. 외관이 장식을 걷어낸 절제된 조형이라면, 실내는 그 반대로 스크린과 디지털 정보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향입니다.
올라 켈레니우스 메르세데스-벤츠 그룹 최고경영자(CEO)는 바그너의 퇴임과 관련해 “고든 바그너는 비전 있는 디자인 철학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며 “그의 창의성과 미래를 내다보는 감각은 메르세데스-벤츠의 미학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표진수 기자 realwater@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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