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관료주의적 규제 4000년 전에도 있었다”
대영박물관·이라크 국가유산청 고고학자들, 인류 역사 최초 행정 문서 설형문자 점토판 발견
고대 수메르 도시 기르수(Girsu) 유적지에서 관료주의에 집착한 흔적 발견
2025-03-19 09:46:05 2025-03-19 09:46:05
기르수 유적지에 발굴된 설형문자 점토판(사진=대영박물관)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레드 테이프(red tape)는 16세기 초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카를로스 5세가 제국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중요한 행정 서류를 묵는 데는 빨간색 테이프를 사용하고 일반 서류들은 평범한 끈으로 묶도록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레드 테이프는 국가 기구의 관료주의적 절차나 불필요하게 복잡한 행정 규제를 의미하는 부정적인 함의를 갖습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정부 관료제와 규제의 상호작용을 비판하면서, 관료들은 자신들의 권한과 예산을 확대하기 위해 더 많은 규제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나 조지프 스티글리츠, 토마 피케티 같은 경제학자들은 정부 개입 없이는 불평등과 시장 실패가 심화한다고 정부 규제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정부의 규제는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시장의 실패를 방지하고 공공의 이익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지만 기업활동을 위축시키고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부정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관료들이 규제에 포획되어 특정 기업이나 이익 집단을 위해 규제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의 규제에 대한 찬반 논란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대영박물관과 이라크 국가유산청(State Board of Antiquities and Heritage)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정부의 규제가 4000년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史實)을 확인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영국박물관의 메소포타미아 전문가인 세바스티앙 레이 박사가 이끄는 발굴팀은 2016년부터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였던 기르수(Girsu)를 발굴해 오고 있습니다. 이 유적지는 원래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발굴되었으며, 두 차례의 걸프 전쟁 이후에는 약탈자들의 표적이 된 바 있습니다.
 
기르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기원전 3천년대에 수메르 신화의 영웅인 닌기르수(Ningirsu)의 성지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 신은 이 지역의 주요 작물인 보리의 신이라는 의미를 갖는 닌우르타(Ninurta)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도시의 전성기에는 면적이 수백 헥타르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2300년경 아카드 왕조 사르곤에 의해 정복되어 아카드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레이 박사에 따르면 사르곤은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수메르 도시를 정복하여 세계 최초의 제국을 이룩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2300년부터 2150년까지 아카드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기르수 유적지에서 고대 국가 기록 보관소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행정 문서라고 할 수 있는 수백 개의 설형문자 점토판을 발견했습니다. 문서들은 고대 문명의 ‘행정 절차(red tape)’를 증명하는 자료로 정부 운영의 세부 사항과 복잡한 관료 체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르수 유적지 발굴 현장의 모습(사진=대영박물관)
 
그 기록들은 국가 업무뿐만 아니라 물고기부터 가축, 밀에서 보리, 직물에서 보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산의 생산과 배송, 그리고 재정지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양이 죽은 사실과 그 장소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점토판에는 금 250그램, 은 500그램, 비육된 소, 맥주 30리터 같은 물품의 항목과 수량, 그리고 시민들의 이름과 직업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점토판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직업은 석공에서부터 신전 바닥을 청소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세분되어 있었습니다. 일부 점토판에는 건물의 설계도, 토지 구획도, 수로 지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레이 박사는 이 문서를 만든 고대인들이 “관료주의에 집착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발견은 대영박물관과 이라크 국가유산청 간의 협력으로 진행된 기르수 프로젝트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바스티앙 레이 박사는 “이번에 가장 중요한 성과는 고고학적 맥락을 살려 제대로 발굴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원래 있던 상태에서 발굴이 이루어져 제국의 규제에 관해 전에 보지 못했던 최초의 물증을 찾아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유물들은 추가 연구를 위해 바그다드의 이라크 박물관으로 보내졌으며, 이후 대영박물관에 대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울러 발굴 결과는 다양한 출판물을 통해 공유될 예정입니다. 
 
기르수 유적지에 발굴된 설형문자 점토판(사진=대영박물관)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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