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기후위기'인가 '기후비상사태'인가?
'기후변화'에서 달라진 용어와 정책에 미친 영향 분석 1
2025-08-11 10:00:07 2025-08-12 09:00:06
지난 2020년 6월30일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한 미국 포트랜드 시. (사진=the City of Portland)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표현은 적정할까? 이제 너무 평온하게 느껴지는 표현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특히 올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겪은 폭염은 위기감을 증폭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용어가 기후변화의 상황을 가장 적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언론과 정부, 시민사회는 더 강렬한 단어를 채택해왔습니다. ‘기후위기(climate crisis)’와 ‘기후비상사태(climate emergency)’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두 용어는 단순한 수사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우선순위와 재정 투입, 시민 인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언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후변화’에서 ‘기후위기’로, 그리고 ‘기후비상사태’로
 
'기후위기(climate crisis)'라는 표현은 1990년대 초부터 학계와 환경운동가 사이에서 사용됐습니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1992년 그의 저서 『위기의 지구(Earth in Balance)』에서 이 용어를 대중화했습니다. 위기는 ‘심각한 위험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는 상태’로, 장기적 추세보다 현재의 급박함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후비상사태(climate emergency)'라는 말은 기후위기에 비해 훨씬 최근의 산물입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 따르면 1989년의 어느 ‘컨벤션 프로시딩스’에 첫 기록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그 컨벤션의 상세 내용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기후비상사태라는 용어의 세계적 확산은 2016년 이후입니다. 언론의 예를 들면 지난 2019년 영국 가디언은 내부 편집 지침을 바꿔 기후변화(climate change) 대신 ‘기후비상사태, 기후위기 혹은 기후붕괴(climate emergency, crisis or breakdown)’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디언의 홈페이지에는 ‘환경(Environment)’의 하위 카테고리로 ‘기후위기(climate crisis)’ 섹션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NYT의 ‘세계(World)’의 하위 카테고리로 ‘기후(Climate)’가 만들어져 있는 것에 비해 훨씬 강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최초의 ‘기후비상사태’ 선언: 오스트레일리아 Darebin 시의회(멜버른)
 
기후비상사태라는 표현은 단순한 언어의 전환이 아니라, 정치와 정책 행위의 신호입니다. 그런데 세계 최초의 기후비상사태 선언이나 선포는 중앙정부나 국가가 아닌, 지방의회에서 시작됐습니다. 2016년 12월5일,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주 멜버른 북부의 Darebin 시의회(City of Darebin Council)는 가장 먼저 ‘기후비상사태’를 공식 선언하며, 세계 여러 지방정부들에 하나의 표준을 제시했습니다. 이 선언은 이후 수많은 지방의회와 지방정부들이 유사한 선언을 하게 하는 ‘도미노 효과’를 촉발했습니다. 지방의회가 최초로,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 단위에서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한 사례라는 점이 관심을 끕니다. 이후 유럽·영연방 국가 지방정부의 공식 선언이 잇따르며 공식적 용어로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한 국가 및 정부는 2019년을 기점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정부 2019년 4월28일, 웨일스 정부 2019년 4월 29일에 이어 영국 하원의 2019년 5월1일 선언이 이어지고, 아일랜드, 지브롤터, 포르투갈, 캐나다,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에서 2019년 중에 잇따라 선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말타, 방글라데시, 안도라, 몰디브, 일본 등에서도 국가 차원의 선언이 진행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약 96%가 해당 선언 지역 내에 살고 있으며, 600여개 이상의 지방의회가 선언을 완료했으며, 캐나다는 635개, 호주도 100개 이상의 지방정부들의 선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기후비상사태 선언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단체 기후비상선언(Climate Emergency Declaration)이 2025년 3월24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유럽연합(EU)과 18개 국가의 정부가 기후비상사태를 공식 선포했고, 전 세계적으로 2366개 이상의 지방정부와 지방의회가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했으며, 해당 지역의 인구는 10억명 이상에 달합니다. 
 
선언이 정치적 수사에 머물지 않으려면…정책 변화로 이어져야
 
기후비상사태의 선언 이후 실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적 쇼’나 ‘제스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용어의 변경이 정책적 의미를 가지려면 기후비상사태 선포와 동시에 구체적인 법적·재정적 장치가 병행돼야 되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한 여러 연구 가운데 런던정경대(LSE,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그랜덤 기후변화연구소(Grantham Research Institute)가 발표한 2021년의 라운드테이블 보고를 살펴봅니다. 이 보고서는 2018년 가을 브리스톨 시의회 녹색당 의원 카를라 데니어(Carla Denyer)가 영국 최초로 ‘기후비상사태’ 결의안을 제출한 이후 영국 전역의 4분의 3이 넘는 지방의회, 대학, 영국 의회까지 잇따라 선언 대열에 합류했다고 밝힙니다. 그 선언의 대부분은 “2030년 탄소중립”이라는, 영국 정부의 2050년 목표보다 훨씬 앞선 일정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선언이 곧 행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언 이후의 ‘실행력’이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많은 지방정부가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했지만, 이제는 진정한 변화를 이끌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대다수의 선언이 주택 단열, 탄소 상쇄 같은 완화(mitigation) 중심이고,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adaptation to climate change)을 언급한 것은 12% 미만이라고 지적합니다. 홍수나 폭염 같은 기후 위험에 대비한 적응 전략은 뒷전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재정적 제약도 발목을 잡습니다. 재원 없는 선언은 결국 구호에 그칠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라운드테이블 참석자들은 지방정부가 모든 수단을 쥔 것은 아니지만, 지역 전체의 행동을 촉발하는 ‘촉매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의회의 계획’이 아니라 ‘지역의 계획’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라며 주민·기업·단체를 묶을 수 있도록 폭넓은 시민 참여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결국 ‘기후위기’와 ‘기후비상사태’ 사이의 선택은 언어의 문제를 넘어 정책의 진정성과 실행력의 문제입니다. 선언에 그칠지, 행동으로 이어질지는 ‘단어’가 아니라 뒤따르는 실천이 결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그 말이 만든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연도별 국가 및 지방정부(도시) 차원의 기후비상사태 선언 추이. (사진=통계 기반으로 챗GPT 작성)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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