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근윤 기자]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경북 청도 사고 이후 철로에서 작업하는 인원들이 긴급하게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을 파악하고 나섰지만, 일선 사업소엔 단 하루 만에 4800㎞ 구간을 모두 점검해 보고하라고 지시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일손과 시간이 부족했던 사업소들은 '현장 실측' 없이 기존 자료를 취합하는 선에서 보고를 올렸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실효성 있는 노동안전 대책과 산업재해 근절을 강조하고 있지만, 공공부문에선 산재 예방 실적을 위한 '보여주기식 대책'에만 골몰한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선로 인근에서 작업 중이던 노동자 7명이 무궁화호 열차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한 지난 19일 경북 청도군 화양읍 삼신리 경부선 철로에서 경찰과 소방, 코레일 등 관계들이 사고가 난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9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코레일 본사는 지난 8월21일 철로 작업자들이 대피할 수 있는 철로 이동통로에 대해 재검토하라는 지시를 시설사업소에 하달했습니다. 이틀 전인 19일 청도 무궁화호 열차 사고가 발생한 데 따른 후속 조치입니다. 당시 사고는 경부선 남성현역과 청도역 구간의 무궁화호 열차 선로 인근에서 비탈면 안전점검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열차에 치인 사건입니다. 2명이 숨지고 5명이 다쳤습니다.
사고 현장은 곡선 구간에다 비탈은 경사졌고 수풀도 우거져 있어 기관사가 작업자를 미처 발견하기 어려웠던 곳입니다. 작업자들이 대피할 공간도 부족했습니다. 코레일에서 만든 '열차운행선로 지장작업 업무 세칙'에 따르면, '상례작업'(열차가 운행되는 선로에서 실시하는 유지보수 작업) 중 열차가 접근할 경우 작업자는 안전한 장소로 대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업 공간과 선로의 이격 거리는 최소 1m 이상 보장돼야 합니다.
이에 코레일은 청도 사고 이후 동일한 사고의 재발을 막고자 철로의 대피 공간을 모두 재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지시는 '작업원 대피 공간 등 이동 통로 확보 현황 자료에 대해 재확인을 요청드리오니, 각 소속에서는 면밀히 재확인하여 수정 사항 반영 제출 부탁드린다'라는 내용이 적힌 공문을 이메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하달됐습니다. 특히 각 시설사업소에 전달된 메일엔 △교량 노변 등 대피 공간 확보 여부 및 필요 현황 △비탈사면 점검로 △터널 입출구부 안전난간 설치 및 필요 개소 등을 검토하는 걸로 내용이 구체화됐습니다.
8월21일 한국철도공사(코레일) 본사에서 지역본부로 전달한 메일(사진 위)과 지역본부에서 시설사업소로 보낸 메일(사진 아래). (그래픽=뉴스토마토)
여기서 문제는 각 사업소가 현황을 파악·보고할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겁니다. <뉴스토마토>가 입수한 공문에 따르면, 코레일 본사는 21일 오전 12개 지역본부에 공문을 전달했고, 지역본부는 같은 날 오후 31개 시설사업소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공문이 첨부된 메일엔 보고서 제출 기한이 '22일까지'로 명시됐습니다.
코레일에 따르면, 사업소 1곳당 평균 현장 직원은 6명입니다. 코레일이 담당하는 열차 선로는 총 4800㎞입니다. 단순 계산하면 사업소 1곳당 154.84㎞, 사업소의 현장 직원 1명당 25.80㎞의 선로를 맡아 대피 공간을 파악해야 하는 겁니다. 더구나 이는 △보행로 확보 여부 △보행로 폭 △안전난간 유무 △안전난간 높이 등을 일일이 확인해야 가능합니다. 사업소가 22일 밤 12시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가정하더라도 공문을 처음 받은 때로부터 계산하면 가용한 시간은 30시간 정도입니다. 사실상 물리적으로 '현장 실측'이 불가능한 셈입니다.
이런 탓에 일부 사업소 직원들은 직접 선로에 나가 실제 대피 공간이 있는지, 어느 정도 크기인지 눈으로 확인하기보다 '열차 순회 영상'을 보면서 대략적으로 파악했다고 합니다. 열차 순회 영상은 달리는 선로점검차에 카메라를 부착, 선로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영상을 찍는 겁니다. 전국적으로 분기당 1회씩 영상을 찍어놓는데, 화질도 낮은 걸로 알려졌습니다. 코레일 본사의 지시에 따라 하루 만에 대피 공간을 파악해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시간은 촉박하고 일손은 부족하니 차선책으로 이렇게라도 해서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영상으로 보는 것과 현장에 나가면 직접 확인하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로변 잡목들, 수풀들이 많은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선로 주변엔 억센 잡목들이 자라는데, 선로 주변을 가리거나 작업자들이 선로 옆을 걸어다는 걸 방해합니다. 제초를 하면 일시적으로는 죽지만, 금방 다시 자라난다는 겁니다.
코레일 관계자는 "(영상으로는) 선로 내 외부 공사 현황이나 도보 폭에 대한 수치 파악 등이 어렵다"며 "방음벽 공사나 무전기 LTE 공사같이 외부 공사로 기존 구조물에 지장물이 추가적으로 생기는 경우엔 업데이트가 돼야 한다. 하지만 사업소마다 해당 부분이 반영이 됐을지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는 "제대로 조사하려면 상례 작업이 최소화되고 직원들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최소 10~15일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경북 청도 열차 사망사고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국내 공공부문은 (산재가 생겼을 때) 들끓는 비난을 잠재우고자 땜질식의 처방에 급급한 상황이다. 그래서 잘못된 진단을 해버리는 것"이라며 "보여주기식 대책은 안전의 형식화를 조장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실효성 없는 과잉 규제를 지키고 처벌을 피하려고, 1년 내내 이어지는 공공기관 평가에 대비하려고 서류 작성에만 매몰되는 형국"이라며 "현장 안전은 뒷전이 됐다"고 했습니다.
한편, 코레일은 이번 지시와 관련해 <뉴스토마토>에 "사업소엔 (대피 공간) '재검토'가 아닌 '재확인'을 요청한 것"이라며 "내부적으로 '선로변 대피 공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조사해 작성했던 자료들에 대한 '재확인'을 요청한 것이고, '무리하게 현장조사를 지시한 사실'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유근윤 기자 9nyoo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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