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한·미 양국이 3500억달러(약 50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조건에서 끝내 접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추진돼 온 관세협상 타결도 안갯속에 빠졌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 정부는 '졸속 합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배수진을 친 모습입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150억" 대 "250억"…핵심은 '연간 현금 투자액'
26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한·미 협상의 핵심 쟁점은 △현금성 투자 규모와 △납입 기간 설정입니다. 세부적으로는 △수익 분배 구조와 △투자처 선정 과정에서의 개입 범위를 놓고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미 양국은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에서 한국의 '현금 투자 비율'을 2000억달러 수준으로 낮추고, 여러 해에 걸쳐 분할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 중입니다. 한국은 한 해 150억달러 이상은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는 반면, 미국은 8년간 매년 250억달러 안팎의 투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앞서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외환 충격 없이 한국이 한 해에 투입할 수 있는 금액이 '150억∼200억달러' 수준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제안한 연간 투자 한도는 이 범위를 사실상 한계선으로 설정한 것으로, 관건은 '납입 기간을 얼마나 늘려 연간 투자 부담을 줄이느냐'입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24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현금 투자의 적정 수준 놓고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라며 "미국 입장을 수용하기는 국민 경제 영향 봤을 때 쉽지 않다"고 언급했습니다.
김 장관은 협상의 3가지 기본 원칙으로 △한국 금융·외환시장에 대한 영향 최소화 △양국 이익의 상호 부합 △프로젝트의 상업적 합리성 확보를 못 박았습니다. 이 가운데 뒤 2가지는 대미 투자 펀드의 '운용 구조'와 직결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25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 전례 따라가면…한국 몫은 '리스크'뿐
미국은 앞서 일본과의 양해각서(MOU)에서 "투자 원금 회수 전 수익의 50%, 회수 후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간다"는 조건에 합의했으며, 이를 한국과의 협상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우리 측이 출자하는 만큼 투자금 회수 때까지는 수익의 90%를 가져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일본처럼 '회수 전 수익 배분'을 50:50으로 나뉘면, 한국은 자금을 대고 손실 위험까지 지는 데 반해, 손에 쥐는 돈은 턱없이 적습니다. 돈이 오랫동안 묶이는 구조에서 이익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손실을 감당할 여력마저 사라집니다.
한국은 투자처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도 요구해 왔습니다. 미국이 투자처 선정권을 독점한 채 펀드를 '고위험 투자' 중심으로 운용할 경우, 한국은 현금 직접투자뿐 아니라 대출·보증 등 간접투자에서도 원금 손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미국이 방위산업·인공지능(AI) 인프라 같은 자국 중심 분야로 투자처를 정하면, 이익 대부분이 미국 기업의 매출·고용으로 흡수돼 한국에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협상을 접고, 3500억달러로 차라리 한국의 관세 피해 기업을 지원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미·일 MOU에는 미 상무장관이 의장을 맡는 투자위원회가 설치되고, 일본은 양국 인사로 구성된 협의위원회를 통해 '자문' 형태로 투자에 참여하도록 규정돼 있습니다. 투자처 최종 승인 권한은 사실상 미국이 쥐는 구조입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현금 투자 등 일부 조건을 완화할 경우, 한국이 수익 배분과 투자처 선정권에서 미국 측 요구를 수용하되 일정한 안전장치를 두는 절충안을 검토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속도 내는 트럼프…'조기 타결' 선 그은 한국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4일(현지시간) 한국과의 협상에 대해 "타결에 매우 가깝다"며 "그들이 타결할 준비가 된다면, 나는 준비됐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 고위 당국자가 "한국이 적절한 조건 수용하면 가능한 한 빨리 합의하고 싶다"고 밝힌 데 이어 나온 발언입니다.
자신들이 요구한 조건을 한국이 수용한다면 곧바로 타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인데, 이재명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 이전 타결 가능성에 사실상 선을 그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24일(한국시간) 공개된 싱가포르 <스트레이츠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금융시장에 미칠 잠재적인 영향력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며 "인위적인 마감 시한을 정해두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한·미 산업 협력 확대가 양국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서도 "우리 국내 산업 공동화를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대미 투자는 '상업적 합리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기존 원칙을 재확인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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