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금융위원회(이하 금융위)의 석유화학·정유업계 금융지원이 혈세 낭비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를 낳습니다. 금융위는 중동 사태 대응을 위해 수십조 원대 유동성을 공급합니다. 하지만 핵심 도구인 신용보증기금(이하 신보)의 프라이머리자산담보부채권(P-CBO)은 심각한 결손금을 기록 중입니다. 석유화학 산업은 이미 구조적 불황을 겪고 있어, 정교한 옥석 가리기도 어렵습니다. 정밀한 리스크 분담 없이 보증만 늘리는 ‘행정편의주의’적 대응이란 지적이 나옵니다.
9일 금융당국 및 기관에 따르면, 금융위는 중동 상황 피해 기업을 위해 P-CBO 차환 시 상환 비율을 기존 10%에서 5%로 낮추기로 했습니다. 후순위 인수 비율과 가산금리도 하향 조정합니다. 지원 대상은 최장 1년 내 만기가 도래하는 P-CBO 잔액 약 9000억원 규모입니다. 이 중 석유화학 기업의 비중은 약 1700억원입니다.
금융위는 정책금융기관의 신규 자금 지원 규모를 기존 20조3000억원에서 24조3000억원으로 확대했습니다. 여기에 추경안이 통과되면 2조5000억원을 추가해 총 26조8000억원까지 늘릴 계획입니다. 민간 금융권도 53조원 이상의 신규 자금 공급에 동참합니다. 또한 석유화학 등 6개 주력산업의 사업 재편을 돕는 1조원 규모의 ‘기업구조혁신펀드 6호’도 본격 가동됩니다.
금융위의 이번 조치는 시스템 리스크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성격이 있습니다. 석유화학·정유업계의 연쇄 도산이 자동차, 조선 등 전 산업으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부실 위험 증가를 우려합니다. 상환 비율을 5%로 낮추면 기업의 빚은 줄지 않고 보증 규모만 유지됩니다. 기업 도산 시 신보가 대신 갚아야 할 대위변제액만 커지는 구조입니다.
P-CBO는 신보의 보증 한도를 사용하는 사업입니다. 부실 위험이 큰 채권을 계속 안고 가면 보증배수(기본재산 대비 보증잔액)가 높아집니다. 정작 지원이 필요한 건실한 우량기업들이 보증을 받지 못하는 ‘기회비용’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수수료와 후순위 인수 비율까지 깎아주는 조치는 신보 입장에서 수익을 포기하고 비용을 직접 부담하는 격입니다.
수익은 증권사가 사유화, 손실은 세금으로 사회화
현행 P-CBO 시스템은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자산 인수단인 증권사는 기초자산이 부실해져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책금융 보증을 ‘무위험 수익원’으로 활용해 이자와 수수료 수익을 챙깁니다. 반면 부실이 터지면 그 손실은 공적 보증기관이 독박을 쓰는 구조입니다. 결손금이 후순위채 규모를 초과하면 중소기업들이 낸 담보금은 증발하고, 나머지 모든 손실은 신보가 세금으로 메꿔야 합니다.
도덕적 해이 문제도 부각됩니다. 증권사들은 ‘신보가 다 막아준다’는 믿음으로 기초자산 심사를 소홀히 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는 금융권 전체의 리스크 평가 역량을 퇴보시킬 수 있습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손실을 세금으로 메꾸다 보니 결정권자와 책임자가 분리되는 구조적 해이가 반복된다”며 “지원 대상 선별 실패와 국가 재정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석유화학 업계의 위기를 중동 사태로만 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미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인한 구조적 불황이 깊기 때문입니다. 원가 상승이나 수요 침체의 원인을 중동 정세와 중국 공세 중 어느 하나로만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기업이 제출하는 소명 자료에 의존하는 ‘서류상 선별’에 그칠 우려 대목입니다.
이는 좀비 기업의 연명을 돕는 착시 효과를 낳습니다. 구조적 한계에 다다른 기업들이 중동 사태를 ‘방패’ 삼아 보증을 연장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직접 지원인 전환사채(CB) 인수 등을 통해 강력한 구조조정을 압박하는 대신, 가장 쉬운 행정 수단인 ‘보증 확대’라는 진통제를 처방한 셈입니다.
정부가 지원 대책을 발표한 지난 7일, 현장에서는 파산 공시가 나왔습니다. ‘신보2023제4차유동화전문유한회사(SPC)’가 파산 절차에 착수한다고 밝힌 것입니다. 이 회사는 2025년 3월 만기 당시 회수해야 할 원금 760억원 중 678억원만 회수하며 약 69억원의 원금 손실을 냈습니다.
그런데도 선순위 투자자인 국민은행은 원리금을 모두 챙겨 떠났습니다. 신보가 지급보증 계약에 따라 43억5100만원을 대신 갚아주는 보증 이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민간 금융기관이 설계한 상품의 부실은 신보의 미상환 차입금으로 전이됐습니다. SPC는 남은 부실자산 일체를 신보에 대물변제하기로 하고 파산을 택했습니다. 정부가 상생을 외치던 시각, 물밑에서는 또하나의 보증 부실이 터진 형편입니다.
신보의 재무 상태는 열악합니다. 2009년 회계기준 변경 이후 정부 등이 부실 방어를 위해 쏟아부은 출연금만 누적 24조원에 달합니다. 하지만 현재 신보의 적립금은 4조8000억원 적자로 결손 상태입니다. 지난 15년간 24조원의 수혈 자금을 모두 소진하고도 추가 적자가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정부의 현금 주입에 의존하는 ‘인공호흡기 경영’이란 지적도 나옵니다. 그럼에도 산업금융지원 규모는 2022년 1조7000억원에서 2025년 예산 기준 4조4000억원으로 2.6배 급증했습니다. 위기 때마다 신보를 구원투수로 등판시켜 보증 규모를 강제로 키운 결과입니다.
‘관피아·모피아’ 임원진과 리스크 관리의 부재
책임 경영의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됩니다. 신보의 이사장과 감사 등 주요 상임임원진은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출신 등 이른바 ‘관피아·모피아’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들은 현장의 리스크를 정밀하게 평가하기보다 정부의 정책 기조를 이행하는 데 더 충실할 수 있습니다.
정부 정책의 모순은 지원 규모의 비대칭성에서도 드러납니다. 금융위가 신보를 통해 쏟아붓는 유동성 공급 규모는 수십조 원에 달하지만, 그에 비해 산업 체질 개선을 위한 ‘기업구조혁신펀드’는 1조원 규모에 그칩니다.
업계 관계자는 “구조적 불황에 빠진 석화 산업에 필요한 것은 대출을 통한 연명이 아니라 자본 투입을 통한 사업 재편”이라며 “하지만 정부는 책임이 따르는 구조조정 대신, 사후 부실을 미래 재정으로 떠넘기기 쉬운 행정편의적 보증 확대를 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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