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표진수 기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2028년까지 총액 210억 달러(약 31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내놨습니다. 미 루이지애나주에 제철소를 건립하는 등 대규모 투자를 통해 ‘트럼프 시대’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한국 기업인 최초로 미 백악관에서 이뤄진 정 회장의 대미 투자 발표는 전격적이었습니다. 현대차그룹 내에서도 세부 내용은 극소수만 알고 있었을 정도로 비밀리에 투자계획이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각)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현대차그룹의 대미 투자계획을 발표하기 앞서 발언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정 회장의 깜짝 발표는 24일(현지시각) 미 워싱턴 D.C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오벌 오피스) 바로 옆인 루스벨트 룸에서 진행됐습니다. 정 회장이 발표하는 동안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존슨(루이지애나) 미 연방 하원의장, 제프 렌드리 주이지애나 주지사, 스티브 스칼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등이 자리를 지켰고, 현대차그룹에서는 장재훈 현대차 완성차 담당 부회장,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성김 현대차 고문, 서강현 현대제철 사장 등이 참석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루스벨스룸에 들어서는 정 회장과 악수를 나눈 뒤 연단에 올라 “아름다운 발표를 할 것”이라며 “매우 흥분된다”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현대차의 개략적인 투자 내용을 발표한 트럼프 대통령은 “진정 위대한 기업인 현대와 함께하게 돼 큰 영광”이라며 정 회장에게 발언을 요청했습니다. 한국 기업인이 미국 정치권력의 핵심부인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대규모 대미 투자 발표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어 정 회장이 연단에 올랐고, 자신의 뒤편에 선 트럼프 대통령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고 초청해줘서 감사하다”며 “새 임기를 주목할만하게 시작한 것을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잘 되고 있다”고 화답했습니다. 정 회장은 “현대차는 1986년 미국 진출 이후 2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 현재 미국 50개 주에서 57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지원하고 있다”며 “앞으로 4년 동안 추가로 21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이는 현대차가 미국에 투자한 사상 최대 규모”라고 했습니다.
정 회장은 “핵심은 철강 및 부품에서 자동차에 이르는 미국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한 60억달러의 투자”라며 “현대제철이 루이지애나의 새로운 공장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게 돼 기쁘다. 이는 1400개의 미국인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국 내 자동차 공급망의 자립성과 안보를 높이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밝혔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각)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한국의 대미 신규 투자를 발표하면서 정의선 (왼쪽 세 번째부터) 현대차그룹 회장, 장재훈 현대차 부회장, 성 김 현대차 사장, 서강현 현대제철 사장 등을 호명하고 있다. 정의선 회장은 향후 4년간 210억 달러(약 30조8175억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사진=뉴시스)
현대차그룹의 대미 투자는 △자동차 86억 달러 △부품·물류·철강 61억 달러 △미래산업·에너지 63억 달러로 나뉩니다. 이번 투자를 통해 미국 현지 생산량을 120만대까지 확대하고, 현대제철 해외 1호 생산 거점을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마련해 '쇳물부터 자동차까지'라는 말로 불리는 완성차 밸류 체인을 구축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제철의 루이지애나 제철소는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해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기아 조지아 공장 등에 공급할 계획입니다. 직접 고용 인원만 1300여명에 달해 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되고 있습니다. 현대제철 또한 트럼프 행정부가 수입산 철강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만큼 현지 생산으로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제철의 루이지애나 제철소 건설로 미국 내 수직계열화 체제를 구축하게 됐습니다. 현대차·기아가 생산하는 완성차에 들어가는 강판과 주요 부품을 미국 현지에서 빠르게 조달할 수 있어 시장 적기 대응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이날 투자 발표장 분위기는 시종 화기애애했습니다. 정 회장은 바이든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착공을 시작한 자동차 제조 공장 ‘현대차그룹 메타 플랜트 아메리카(HMGMA)’를 언급하며 “이번주 조지아의 80억 달러 규모의 새공장을 개장하게 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이로써 미국 내 (현대차의) 차 생산량이 연간 100만대를 넘어설 것”이라고 했습니다.
HMGMA 설립이 과거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 덕분이었다는 덕담도 나왔습니다. 정 회장은 “미국 내 일자리 8500개를 창출하기 위해 조지아주 서배너에 투자하기로 한 결정은 2019년 서울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시작됐다”고 말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을 쳐다봤고,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웃으면서 “맞다”고 답했습니다.
미국 조지아주에 위치한 현대차그룹의 자동차 생산공장인 메타 플랜트 아메리카(HMGMA) 전경.(사진=현대차그룹)
또한 정 회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시작과 동시에 이 혁신적인 프로젝트가 완료돼 더욱 특별해졌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고맙다”고 했고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은 미국 산업의 미래에 더 강력한 파트너가 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깜짝 발표에 걸맞는 깜짝 초청도 이뤄졌습니다. 정 회장이 “최첨단 제조 시설 중 한 곳을 직접 방문해서 미국과 미국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확인해보기를 권한다”며 현대차그룹의 미국 내 공장에 트럼프 대통령을 초청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오케이”라고 답했습니다.
앞서 정 회장은 이전에도 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미 투자 계획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22년 5월에도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방한 중인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50억 달러(당시 환율 약 6조30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2년 10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미 심장부 백악관 연단에서 또다시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한 것입니다.
현대차그룹의 이번 신규 대미 투자계획은 트럼프 집권 2기 출범 이후 한국 기업 가운데 첫 번째로 나온 대규모 투자 계획입니다. 각국 대미 관세율과 비관세 장벽을 감안해 다음달 2일부터 부과될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에 앞서 대미 수출 기업들의 대응도 발빠르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표진수 기자 realwater@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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