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기자] 국제유가가 150달러 전망까지 나오는 가운데 미국이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한시적 허용인 '궁여지책'을 꺼내 들었지만 전쟁 장기화에 대한 우려는 여전합니다.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 바닷길이 석 달 이상 막힐 경우 세계 증시 전반의 밸류에이션(가치평가)에 대한 부정적 영향은 커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악순환에 빠질 수 있는 고물가·고금리 압력은 경제 펀더멘탈을 흔드는 요인으로 지목됩니다. 석유 최고가격제를 가동한 우리 정부도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착수와 물가 관리 등에 주력하고 있지만 대외 충격 민감도가 높은 만큼, 장기화에 따른 변동성 우려는 더욱 고조될 전망입니다.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첫날인 13일 제주 시내 한 주유소 가격 안내판에 유가 정보가 게시돼 있다. (사진=뉴시스)
러시아산 빗장 풀지만…오일쇼크 공포
13일 정부와 외신, 전문기관 등의 말을 종합하면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12일(현지시간) 러시아산 원유 및 석유 제품의 판매를 한시 허용하는 일반면허(GL 134)를 발급했지만 시장 공포는 여전합니다.
미국은 브렌트유가 장중 101.6달러를 기록하자 제재 대상인 러시아 물량까지 시장에 푸는 공급 충격 완화책을 꺼내든 바 있습니다. 전략비축유(SPR) 1억7200만 배럴 방출 결정과 국제에너지기구(IEA) 총 4억배럴 규모의 비축유 공급 합의에 이은 '궁여지책'이나 단기적인 공급 충격 완화에 불과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란이 의지를 굽히지 않고 호르무즈 해협의 바닷길이 장시간 동안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주요 분석기관들은 사태 장기화 우려에 따라 유가 배럴당 150달러 상향까지 내다보고 있습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중동 분쟁은 장기적 금융위기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원유 공급 차질이 동반될 경우 세계 경제 충격은 컸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73년 1차 오일쇼크입니다. 당시 중동전쟁 이후 산유국들의 감산 조치로 국제유가는 배럴당 약 3달러에서 12달러 수준으로 4배 급등한 바 있습니다.
그 결과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2년 3%대에서 1974년 11% 수준으로 치솟았습니다. 고유가 충격은 성장 둔화와 물가 급등을 동시에 초래하며 미국과 주요 선진국 경제를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으로 몰아넣었습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촉발된 2차 오일쇼크에서도 국제유가는 14달러에서 35달러 수준으로 두 배 이상 상승하며 세계 경제 불안을 키웠습니다. 반면 1990년 걸프전 당시에는 유가가 배럴당 약 20달러에서 40달러 수준까지 급등했으나 전쟁이 단기간에 종료되면서 금융시장 충격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역시 공급 차질이 크지 않아 유가 상승폭이 제한되는 등 글로벌 증시 하락도 일시적인 수준에 그친 바 있습니다.
이번 중동 사태 역시 단기 분쟁에 그칠 경우 금융시장 충격은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유 공급망 차질이 장기화될 경우 과거 오일쇼크와 유사한 인플레이션 충격이 재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30년 만에 석유 최고가격제가 시행된 13일 서울시내 한 주유소에서 시민들이 주유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물가 폭등 위험'·경기 완충력 부재' 사이
가령 호르무즈 해협이 3~6개월 지속적으로 봉쇄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할 경우 코로나19 이후 누적된 고부채와 맞물려 금리 상승, 이자 비용 증가, 재정적자 확대, 국채 공급 증가의 악순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분석합니다.
주혜원·김윤경 국제금융센터(KCIF) 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중동 사태발 유가 충격이 주요국 통화정책의 '차별화'와 '긴축 확산'을 가속화할 것으로 봤습니다. 호주는 주거비(6.8%) 등 광범위한 물가 상승으로 인해 금리 인하 6개월 만에 긴축, 선회했습니다. 유가 상승은 자재 운송비와 건설 장비 운영비, 주거 유지비에 즉각 반영됩니다.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로존과 영국은 유가 상승이 기조적 물가로 전이될 위험이 커지며 인하 지연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특히 서비스 소비자물가지수(CPI) 바스켓인 물가 지수 산정 품목은 75%가 2.5% 이상의 상승률을 기록했습니다. 물가 압력이 확산되고 있는 겁니다.
가까운 일본은 5.25%라는 기록적인 임금 인상률과 상향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연율 1.3%)을 근거로 정책 정상화 경로를 밟고 있습니다. 즉, 유가 충격이 와도 금리 인상(정책 정상화)을 밀어붙일 여유가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물가 폭등 위험'과 '경기 완충력 부재' 사이에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정부가 유가 최고가격제와 추경 카드를 동시에 꺼낸 이유도 한국 경제 구조상 유가 충격이 발생할 때 '고물가·고금리'의 충격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임기근 기획예산처 장관 직무대행 차관이 1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중동상황 점검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주재,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대외 충격 민감도에 좌우…추경 착수
주혜원 책임연구원은 "이란 사태에 따른 유가 충격은 호주·일본 중심에 머물렀던 긴축 흐름을 여타 주요국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향후 통화정책 경로는 기조적 물가로의 전이 여부와 경기 완충력, 대외 충격 민감도 등에 좌우될 전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향후 에너지 가격 상승이 기대인플레이션 및 임금·서비스 물가를 통해 기조적 물가로 전이되는 정도가 핵심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라며 "금리 상승, 이자 비용 증가, 재정적자 확대, 국채 공급 증가의 악순환 형성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이은재 부전문위원은 "(주식)시장은 이번 중동 사태가 4~8주 내에 끝나는 시나리오를 가격에 반영하고 있으며 호르무즈 해협이 3~6개월 지속 봉쇄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반영"이라며 사태 추이에 따른 변동성이 지속될 수 있다고 시사했습니다.
임기근 기획예산처 장관 직무대행 차관은 "이번 추경은 추가 국채 발행 없이 예상되는 초과 세수를 활용해 편성함으로써 국채·외환시장 등의 영향은 최소화할 예정"이라며 추경 대상 사업으로는 고유가 상황 대응을 위한 물류·유류비 부담 경감, 서민·소상공인·농어민 등 민생 안정, 외부 충격을 직접 타격 받는 수출기업 지원 등을 언급한 상태입니다.
세종=이규하 기자 judi@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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