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1. 진시황제 영정
‘천고일제(千古一帝)’, 천년에 한 번 나올 수 있는 지배자란 뜻의 사자성어. 이에 해당하는 첫 번째 인물이 중국 최초 황제로 진을 건설한 영정(진시황). 영정이 자신을 위해 만든 칭호가 ‘황제’이고, 자신을 위해 고른 1인칭 주어가 ‘짐’이었다. 영정은 6국을 통일하고 난 후 3황5제의 공을 모두 합쳐야 자신과 견줄 수 있단 자부심으로 황제란 칭호를 만들었다.
중국인들은 정복 군주로서 영정의 성취를 ‘통일6국’ ‘남평백월’ ‘북격흉노’란 성어로 요약한다. 영정이 남정으로 백월을 정복했단 역사적 사실은 한국인에겐 생소할 수 있다.
이미지=뉴스토마토
2. 백월
초, 오, 월이 있던 지역이 고대 중국인의 인문지리적 감각으로 남만이었고, 시대가 변하면서 남만을 대체한 개념이 월이 됐다. 월은 비엣인이 아니라 따이인이라는 게 최근 유전체 분석 결과이다. 오는 월에 흡수됐고, 월은 초에 흡수됐다. 영정은 초를 정복하고 군을 설치해 직접 통치를 하면서 그 주변에 이미 멸망한 월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고 부족연맹체 수준의 국가들도 여럿이란 것을 실감하게 됐다. 이들이 백월이다. 절강성 원저우에 있는 동오우, 복건의 민월, 광동의 남월, 광서의 서오우, 홍강 유역에 있던 락월은 부족연맹체 수준 국가였다.
3. 1차 백월 정복전쟁
영정은 백월을 정복하기로 결심하고 남정군을 편성해 총사령관으로 도휴, 부사령관으로 조타를 임명했다. 남정군은 50만 대군이었다. 중국 진나라 붕괴 과정에서 조타는 광동에서 독립해 남월국 황제가 된다. 남정군은 절강성에서부터 광동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면서 동오우, 민월, 남월을 정복하고 민중군과 남해군을 설치했다.
서오우는 남정군이 험준한 5개 봉우리가 있는 남령산맥을 넘어가야 대적할 수 있는 상대였고, 락월은 가장 남쪽인 베트남 홍강 유역에 있어 서오우를 정복해야 만날 수 있었다. 서오우와 락월은 상비군이 따로 없어 족장이 주민을 직접 이끌고 싸워야 하는 전민개병제 국가들이었다. 참고로 서오우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
도휴가 인솔하는 남정군 주력부대는 광서 지역에서 역우송이란 부족장이 이끄는 서오우군과 격돌했다. 진나라 군대는 6국통일이란 실전으로 단련된 정예 강군으로, 훈련돼 있지 않은 서오우군은 맞상대가 될 수 없었다. 서오우군 전열이 바로 무너지고 역우송은 전사했다. 따이인들은 자신들 지도자를 잃었으나 항복하지 않았고, 침략자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는 걸 죽음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따이인은 필사적으로 도망쳐 진령산맥으로 들어갔다.
참혹한 패전을 통해 따이인들은 전문적 군사 지휘관 필요를 느끼고 자신들을 이끌어줄 사령관으로 걸준을 선출했다. 걸준은 아군 피해를 최소로 줄이면서 원정군을 최대로 괴롭할 수 있는 전법을 짜냈다. 장기 항전을 감당할 만한 장정을 선발해 유격부대를 조직했고, 유격전을 감당할 수 없는 주민들은 남령산맥 기슭에서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감당했다.
라오인들은 하안거를 끝내면서 마을 대항 배 경주 대회를 한다. 수도 비엔티안의 메콩강. 사진=오광석 작가
걸준이 지도하는 반격전은 20세기 인도차이나 전쟁 양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령산맥 서쪽 끝 월성령에서 동쪽 끝 봉우리 다유령까지는 오늘날 포장도로를 이용해도 최단거리가 620Km에 달한다. 이런 광대한 영역에 들어선 걸준의 게릴라부대를 무슨 수로 포위해 섬멸을 할 수 있겠는가.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항공 전력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럼 주목해 봐야 할 점은 따이인의 전통적인 배 만드는 기술이다. 걸준의 유격대는 광동 광서 지역의 습지가 많은 복잡한 물길을 이용해 기동전을 전개했다. 오늘날에도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 사는 라오인은 집집마다 작은 배를 갖고 있다. 전통 배를 만드는 나무는 수액에 기름기가 많다. 전기가 보급되기 이전 이 수액으로 불을 밝히기도 했다. 전통 배는 아름드리 나무 속을 파내서 만드는 간단한 구조지만 방수가 돼 편리하고, 한두 명으로도 쉽게 운반할 수 있어 기동성을 살릴 수 있다. 도로가 발달하지 않아 대규모 부대가 쉽게 이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오우군은 배를 통한 기동전으로 원정군 보급선을 끊고자 했다. 원정군 진영을 향해선 야간에만 치고 빠지면서 원정군의 피로를 높였다.
북방 출신이 많은 원정군에게 최대의 적은 끊임없는 기습과 매복보다 심각한 것이 기후였다. 도휴의 병력은 원정이 길어지자 북방 출신이 많아 덥고 습한 기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풍토병에 시달렸다. 마침내 걸준의 부대는 총사령관 도휴가 이끄는 원정군 부대를 밀림으로 유인해냈다. 도휴는 매복한 서오우군 독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전사했다. 총사령관 전사로 도휴가 이끄는 30만 병력은 궤멸적 타격을 받고 완패했다.
라오스 시골 마을의 배. 캄무완주 꽁로마을. 사진=정우택 작가
4. 2차 백월전쟁
서오우와 락월을 제외한 다른 백월 소속 국가들이 모두 정복된 관계로 2차 백월전쟁은 진의 원정군과 서오우-락월연합군 전쟁으로 단순화 됐다. 진시황은 패배의 원인을 장군에게서 찾지 않고 보급의 문제로 봤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로마군 장점은 공병에 있다. 진나라 군대 장점도 공병에 있었고 경험이 쌓여 있었다. 물길을 둘로 나누는 도강언이란 토목공사는 사천을 풍요의 지역으로 만들었다. 150km의 황하와 장강 상류를 잇는 ‘정국거’란 운하는 ‘관중에 흉년이 없다’는 말을 생겨나게 했다.
진시황은 호남성 상강과 광서 계림의 리강을 연결하는 37Km 군사용 운하를 건설하는 책임을 남정군 감독관이자 어사였던 감록에게 맡겼다. 운하가 완성되고 붙인 이름은 영거(靈渠)였다. 이 운하 건설로 진나라에서 남정군에게 보내는 보급의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남정군 부사령관이던 조타는 갑옷을 수선할 수 있는 여자들까지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진시황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조타의 요청에서 진시황이 행간을 읽었는지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주둔군과 군속으로 따라온 여성들이 중국 남부 이민자 사회 출발점이었다.
진시황은 전사한 남정군 총사령관 도휴의 뒤를 이어 ‘임효’란 명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10만명 병력을 충원해 다시 출정시켰다.
중과부적 상황에서 서오우군은 결국 남정군에게 패배했고, 조타가 전개한 3차 백월전쟁으로 서오우란 방패를 잃은 락월마저 무너졌다. 남월이 있던 광동에는 남해군, 서오우가 있던 광서에는 계림군, 홍강 유역 락월이 있던 곳엔 상군이 설치되면서 백월전쟁은 진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5. 백월전쟁의 결과
진나라 통치를 받아들인 백월 지역 따이계 주민은 좡족의 시작이 됐지만, 진나라 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던 따이인 부락은 인도차이나와 운남 방향으로 대규모 이주가 불가피했다. 초나라 건국 세력이던 3묘, 몽-미엔어를 쓰는 먀오족과 야오족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중국의 장강 유역에 살던 소수민족에게 쌀의 인구 부양력과 운남과 귀주 그리고 인도차이나 내륙 라오스와 태국 같은 인구 희소 지역에게 서양과 달리 패배한 민족의 남성 유전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극단적 인구절벽은 나타나지 않았다.
진시황의 남정은 진나라 운명에 군사적으로 적지 않은 후과를 남겼다. 진나라 붕괴 때 북벌군과 남정군으로 정규군이 주둔지에 나가 있어 본토 반군을 즉각 진압할 수 있는 대규모 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을 진나라 붕괴의 군사적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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