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대통밥. 대나무에 찹쌀을 넣고 코코넛 가루로 막은 다음 불에 구워 만든다. (사진=우희철 작가)
1. 엥겔스 생일
직원 펫이 사무실에 나오지 않았다. 펫은 정시 출근이 드물고 지각이 예사라 그러려니 싶었다. 훈계와 잔소리도 해보고 벌칙을 적용해도 소용없다. 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통신사 녹음이 들려온다. 짜증이 나다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감까지 몰려온다. 면접을 보던 날, 펫은 급여와 휴일에 대해서는 꼬치꼬치 물어보고 업무에 대해 자세하게 물어보지 않아 서운했었다. 라오스 직원을 처음 뽑아보는 게 아니라 그러려니 했다.
다음 날 펫이 출근했다. 표정과 태도는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태연하다. 펫에게 결근 이유를 물었다. 휴일이라 쉬었단다. 라오스 달력을 확인해봐도 평일인 게 확실했다. 내가 무슨 휴일이냐 물으니 펫이 득의양양하게 달력을 보여준다. 라오어를 어찌어찌 해독해보니 ‘엥겔스 탄신일’이다. 하루라도 휴일을 벌려고 빨간날이 많은 달력을 구해 온 것이다. 마르크스도 아닌 엥겔스 탄생일까지 챙기는 라오스 인민혁명당 달력. 빨간날과 생리휴가 하루까지 더해서 쉬라고 한 내가 잘못이지, 펫이 작심하고 달력까지 구해 온 마당에 내가 져야지 어떻게 이기겠나.
천수국으로 작은 탑을 만들어 탑돌이를 하는 여성. 탑돌이는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 돈다. (사진=우희철 작가)
2. 꺼다이 선생
중국의 문호 ‘후스’가 쓴 <차부뚜어 선생전>은 짧은 전기체적 우화소설이다. 차부뚜어는 ‘차이가 크지 않다’는 뜻이다. 후스는 성은 '차', 이름은 '부뚜어'라는 우화적 인물을 만들어 중국에 만연한 대충주의, 적당주의를 비판했다. 차부뚜어가 급한 병에 걸려 의사 대신 수의사에게 치료를 받다 죽는 게 결말이다. 중국에 ‘차부뚜어’ 선생이 있었다면, 라오에는 '꺼다이' 선생이 있다.
라오어로 꺼다이는 이것도 되지만 ‘그것도 된다’는 뜻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관용적이고 융통성 있고 포용적 태도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라오인에겐 표준이란 게 없다 정도. 청소를 하면 빗자루질과 걸레질에 힘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는 없는 것과 같고, 한번 밀어서 지워지지 않는 얼룩과 자국은 그냥 둔다. 모든 일에 깔끔한 마무리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해진 기한이나 마감에 맞춰 일을 끝내는 법도 없다. 라오인들에게 몇 번 데이고 나면 대안을 찾게 되는데 그때 찾는 사람들이 비엣인들이다. 공사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나는 비엣인을 먼저 찾게 된다. 라오인과 비엣인은 노동에 대한 태도와 의지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라오인 노동력을 불신했다. 1937년 식민 시절 라오스에 프랑스인은 574명만이 거주했고, 식민 당국자는 이 숫자보다도 적었다. 라오스 마지막 왕국이 있던 루앙프라방을 제외하고 총독부가 있던 비엔티안 인구 53%, 타켁에 85%, 빡쎄에 62%가 베트남인으로 구성됐다. 1945년까지 프랑스는 베트남 농민들을 비엔티안 평야, 사와나켓 지역, 볼라벤 고원으로 대규모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의 인도차이나 침공으로 저지됐다. 역사학자 마틴 스튜어트-폭스는 이 계획이 실행됐더라면 라오인에 의한 라오스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평했다.
난 라오식 아파트 열 칸과 라오식 단칸 셋방 다섯 칸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하다가 임대업으로 전환했다. 입주자들은 베트남 엔지니어와 건설노동자, 필리핀인 사무직, 태국인 인테리어 기능공이었다. 이들은 비엔티안 왓따이 국제공항 개조 공사에 참여한 인력들 일부였는데, 이들에게 방을 얻어준 건 일본인 회사였다. 시공을 담당한 회사는 라오인 노동력을 최소화하고 외국인을 고용해 공사를 진행했다. 유일한 라오인 사무직 근무자는 회사를 대리해서 내게 방을 빌리러 온 사람이었고, 그는 통역 겸 잔심부름을 하는 하급 실무자였다.
중국 측이 진행한 철도 공사, 고속도로 공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오스 당국은 이런 상황에 대해 자국 노동력에도 책임이 있다고 시인할 정도였다. 과거 중국에 차부뚜어 선생님들이 많았다면 현재 라오스에는 꺼다이 선생들이 여전히 너무 많다.
라오인들에게 회자되는 국민성 평가가 있다. 집 안에 기름이 떨어졌다. 라오인은, 방물장수가 마을에 방문할 때까지 기다린다. 비엣인은, 떨어지기도 전에 미리 기름을 사러 간다. 중국인은, 자기가 쓸 기름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팔 기름까지 사 와 장사한다.
방생. 조롱에 든 새를 놓아준다. 새를 파는 사람들은 ‘방생’이란 단어를 배워 한국인에게도 판다. (사진=우희철 작가)
3. 라오인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들어하는 말
라오인에게 사과 받기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어려울 수도 있다. 음주운전으로 지인 차량을 들이받고 도망친 경찰관이 있었다. 지인과 합세해 범인을 잡았다. 시경에 근무하던 그는 사죄 대신 차 안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나를 겨누며 위협했다. ‘받아볼래?’ 총알을 맞아보겠냐는 위협이었다. 우리가 요구한 건 처벌과 보상이 아니었다. 잘못했다는 사과였다.
사소한 일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미안하다’ 말하는 걸 기대하는데 라오인은 자꾸 변명하니 열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상대가 화를 거두지 않으면 라오인은 웃으면서 ‘보뻰냥’이라 한다. ‘No problem, 문제없다’는 라오어다. 상대가 해줘야 할 말을 라오인 당사자가 하니 적반하장이라, 듣고 있으면 화가 더 커진다. 라오인이 지나치게 자존심 세고 가벼운 사과에도 인색한 이유에 대해 한국인들끼리의 설득력 있는 해석은, 잘못을 시인하면 무지막지한 인민혁명당의 박해가 뒤따랐기 때문이라 한다.
라오스의 지식인들에게 이런 주제로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봤다. ‘라오인에게 절박한 생존의 위협이란 없었다’라는 대답이 내게 가장 그럴듯하게 들렸다. 1900년 프랑스는 라오스 인구를 47만명으로 추산했다. 현재 라오스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의 25% 정도만 개간됐다. 기후만 따지면 쌀은 3.5기작도 가능하다. 라오인의 인격 형성에 크게 작용했을 거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라오인의 계급적 성분은 기본적으로 농노나 소작인이 아닌 자유민으로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지주였다. 공동체에 묶여 움츠리고 뛸 수 없던 존재도 아니었다. 아직도 미개간지가 널려 있는데.
라오인끼리 심하게 다투면 소 닭 보듯 평생 내외를 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자존심 굽혀가며 갈등을 눙치거나 타협할 필요 없이 서로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살아버리면 그만이다. 라오인은 말이 통하고 혈연적으로 같은 따이인에 속한 타이인을 부러워하는 한편으로 질시한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 흐르는 감정과 비슷하다. 근대 문명화 과정을 경험한 한국인으로서 근대성이 약한 다른 문명권의 라오인과 산다는 게 마음 상할 때가 많지만, 한편으로 인구압과 극심한 결핍을 일상적으로 겪지 않던 소국과민 세계에서 살아온 라오인이 부럽고 질투 날 때가 있다. 내일을 향한 걱정이 아닌 당장 행복을 위해 살 수 있던 사람들이다.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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